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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시인들
필요한책 | 부모님 | 2025.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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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의 한 영역을 대변하며 시문학의 혁명에 동참했던 폴 베를렌. 그가 차지하는 세계적인 위상과 문학사적 영향력에 비해 지금 우리나라에서 그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편이다. 우리나라의 본격적인 근현대 시문학이 그의 시를 번역 출간하면서 함께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렌의 작품에 대한 주목도가 낮은 것은 그의 작품이 지극히 프랑스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가장 유명한 에세이이자 역사적 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작품, 『저주받은 시인들』이 완역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평온함을 유지하려면 절대적인 시인들이라고 말했어야 했지만, 이 시대에 평온함이란 별로 적절하지 않을뿐더러, 우리의 제목은 우리의 혐오에 정확히 부합하고, 확신컨대 그런 전지전능한 사람들에 해당하면서 살아남은 자들의 혐오에도 부합한다. 이는 우리에게 그 감정을 똑같이 되돌려 주는 거친 군대, 즉 엘리트 독자들의 저속함에 대한 혐오이다.상상력에서 절대적이고, 표현에서 절대적이며, 최고의 시대를 만든 진정한 왕들처럼 절대적이다. 그러나 저주받은 자들이다!판단해 보라.
트리스탕 코르비에르는 브르타뉴인으로, 선원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거만함의 대명사이자 세 겹으로 중첩된 청동의 마음을 지닌 자였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신앙의 실천은 거의 없었지만, 악마의 존재는 믿었던 브르타뉴인이었다. 군인도, 특히 상인도 아닌 선원이었지만, 폭풍우 속에서만 항해했던 바다에 대한 광적인 사랑을 품고 있었으니, 그는 가장 사나운 말과 같은 바다에 극도로 격정적이었으며(그의 무모할 정도로 놀라운 행동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성공'과 '영광'을 너무나 경멸하여 이 두 어리석은 것들이 자신의 연민을 잠시라도 자극할 수 없으리라고 말하는 듯했다!
랭보의 작품들은 아주 어렸을 적, 즉 1869년, 1870년, 187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매우 풍부하며 상당한 분량의 작품집을 형성할 것이다. 이 작품집은 대체로 짤막한 시들인 소네트, 트리올레triolets, 4·5·6행 시 들로 구성된다. 시인은 쌍각운雙脚韻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시구는 탄탄하게 자리 잡혀 있고, 인위적인 기교가 거의 없다. 자유로운 중간 휴지休止도 거의 없고, 앙장브망Enjambement은 더더욱 없다. 단어 선택은 항상 세련되고, 때때로 의도적으로 현학적이다. 언어는 순수하고 명확하게 유지되며, 개념이 심오해지거나 의미가 모호해져도 그렇다. 운율은 대단히 훌륭하다.

  작가 소개

지은이 : 폴 베를렌느
1844년 3월 30일 프랑스 로렌 주(州) 메츠에서 공병 장교인 아버지와 부농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너무도 귀하게 태어나 가족으로부터 맹목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란 어린 베를렌은 버릇이 없었지만, 다행히도 명민한 아이였다. 열한 살이 되자, 보나파르트 고등학교(Lycee Bonaparte)에 진학했는데, 불어, 라틴어, 그리스어 등, 특히 언어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7년 과정의 이 학교에서 베를렌은 처음 3년 동안은 분명 모범생이었지만, 4년째 접어들자 돌연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고 시와 소설에 몰입한 문학 소년이 되었다. 1862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해서 가까스로 법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지만 대학생이 된 그는 또다시 문학에만 몰두할 뿐, 정작 법률 공부는 등한시했다.아버지의 강요로 잠시 보험회사 직원으로 일하던 베를렌은 이내 대학 공부를 집어치우고, 1864년 파리 시청의 직원 채용 시험에 합격해 등초본 계원으로 근무하면서 생활의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 덕에 1865년부터 베를렌은 마음 편히 문필 활동을 병행할 수 있었으며, 1869년 친구의 이복여동생인 마틸드 모테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1년의 교제 끝에 혼인했다.1871년 3월, 파리에 시민 혁명 정부인 코뮌이 수립되자 베를렌은 협력자로서 홍보 관련 일을 맡기도 했는데, 두 달 만에 코뮌이 진압된 후, 그 일로 인해 처벌받을까 두려웠던 그는 외가 친척들 집을 옮겨 다니며 은신하다가 결국 시청으로부터 파면 통보를 받았다. 이 무렵, 안면부지의 열일곱 살 문학청년 랭보가 베를렌 앞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와 함께 자작시 몇 편을 보내왔다. 랭보의 시에 탄복한 베를렌은 이윽고 랭보를 불러 처가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반항적인 랭보는 보름 만에 그 집에서 쫓겨나 베를렌의 친구들 집을 전전했으며, 이때부터 베를렌은 랭보와 아내 마틸드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1873년 7월, 브뤼셀의 한 호텔에서 지내던 베를렌의 부름을 받고 랭보가 찾아왔다. 격렬한 언쟁이 이어졌고 술에 취한 베를렌은 파리로 떠나겠다는 랭보를 향해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의 탄환 중 한 발이 랭보의 손목에 경상을 입혔고, 베를렌은 벌금형과 함께 2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곧장 형무소에 수감되었다.이듬해인 1874년 4월, 파리 법원은 마틸드의 청원을 받아들여 베를렌 부부의 법적 별거 선고를 내렸는데, 벨기에 몽스(Mons) 감옥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베를렌은 가톨릭에 귀의해 7월에 영성체 의식을 치렀다. 1875년 1월이 되자 마침내 베를렌은 석방되었고, 그 뒤 1880년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사립학교 몇 군데를 오가며 교사 일을 하는 동시에 꾸준히 시를 써 나갔다. 1882년 7월, 파리 근교의 한 호텔에 거처를 정한 베를렌은 지난 10년간 소원했던 파리의 문인들 곁으로 돌아왔는데, 그간에 완성한 그의 시들이 ≪현대적인 파리≫를 비롯한 여러 문학잡지를 통해 연이어 소개되었다. 나날이 깊어 가는 병세에도 불구하고 베를렌은 왕성한 필력으로 여러 편의 산문집과 시집, 희곡 작품을 발표했으며, 어느덧 프랑스 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1892년에 들어서면서 젊은 숭배자들의 초청으로 베를렌은 네덜란드와 영국, 프랑스를 돌며 시학 강연을 이어 갔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가장 훌륭한 시인을 뜻하는 ‘시인의 왕’이라는 영예로운 칭호가 있었다. 빅토르 위고에게서 그 칭호를 계승한 르콩트드릴이 1894년 세상을 떠나자 시인들은 새로운 ‘시인의 왕’을 뽑아야 했는데, 400명 가까운 젊은 문인들에게 설문 조사를 한 결과 당대의 유명 시인들 중에서 베를렌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시인의 왕’에 선출되었다.하지만 살아생전의 영광도 잠시뿐. 1896년 1월 8일, 폐울혈 증세를 보이던 베를렌은 급기야 52세를 일기로 그 자신이 표현했던 “저주받은 시인”다운 처량하고 굴곡진 삶을 마감했다. 이틀 뒤 수천 명의 장례 행렬이 애도하며 그의 유해를 파리 북쪽의 바티뇰(Batignolles) 묘지로 운구했으며, 그와 절친했던 여러 문인들이 애절한 추도사를 낭독했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시인 말라르메는 베를렌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한 기금조성위원회를 발족했고, 그 결실로 마침내 1911년 파리 뤽상부르공원의 양지바른 곳에 그의 흉상을 새긴 추모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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