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철학은 삶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위한 것일까? 철학은 죽음과 대결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철학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죽음도 존재의 일이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은 자, 성숙한 인간의 도리인지 모른다. 생성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존재(자연)의 본질이다. 죽음도 바로 생성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이것이 도법자연(道法自然),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이다.
서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고정 불변의 존재를 가정한 철학이다. 반면 동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생성 변화하는 존재를 받아들인 철학이다. 서양 철학은 ‘앎(지식)’을 추구하였고, 동양 철학은 ‘삶(도학)’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은 지식과 법칙을 탐구하는 문명이었고, 동양 문명은 도덕과 수양을 목표로 하는 특징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서양 철학의 고정 불변의 존재인 자아, 영혼, 영원, 영생, 신(여기서 신은 신이 아니다神可道 非常神.)이라는 말은 위로와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대화를 위해서 혹은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기 위한 삶의 기법이다. 생멸은 분명히 동시적인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사이(間)-간격(間隔)을 줌으로써 자연을 자기의 존재 방식으로 해석한 존재가 인간 현존재의 특성이다. 사이-간격은 바로 시공간을 의미한다.
출판사 리뷰
철학은 삶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위한 것일까?
철학은 삶을 위한 것일까? 죽음을 위한 것일까? 철학은 죽음과 대결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철학은 죽음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는 학문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죽음도 존재의 일이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깨달은 자, 성숙한 인간의 도리인지 모른다. 생성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존재(자연)의 본질이다. 죽음도 바로 생성 변화의 한 과정일 뿐이다. 이것이 도법자연(道法自然),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이다.
서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고정 불변의 존재를 가정한 철학이다. 반면 동양 철학은 그 출발부터 생성 변화하는 존재를 받아들인 철학이다. 서양 철학은 ‘앎(지식)’을 추구하였고, 동양 철학은 ‘삶(도학)’을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은 지식과 법칙을 탐구하는 문명이었고, 동양 문명은 도덕과 수양을 목표로 하는 특징을 지녔는지도 모른다.
서양 철학의 고정 불변의 존재인 자아, 영혼, 영원, 영생, 신(여기서 신은 신이 아니다神可道 非常神.)이라는 말은 위로와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대화를 위해서 혹은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기 위한 삶의 기법이다. 생멸은 분명히 동시적인 일이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사이(間)-간격(間隔)을 줌으로써 자연을 자기의 존재 방식으로 해석한 존재가 인간 현존재의 특성이다. 사이-간격은 바로 시공간을 의미한다.
시공간은 동일성(실체)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생사(生死)와 유무(有無)를 만든 것이 인간이다.
흔히 이성 중심의 철학에서 욕망 중심의 철학을 발견한 ‘의심의 철학자군’인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를 이성 중심의 근대 철학자와는 달리 후기 근대 철학자들로 분류하지만, 실은 이성과 욕망은 같은 것이다. 욕망은 신체적 이성이고, 이성은 대뇌적 욕망임을 안다면 서양 철학자들은 결국 한통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헤겔의 유심론과 마르크스의 유물론, 헤겔의 절대정신과 니체 권력의 의지는 겉모양(기표)은 다른 것 같지만, 의미(기의)는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서양 철학의 이성이든, 욕망이든 결국 대상과 목적, 그리고 현상(표상, 실체)에 치중함을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서양 철학은 모두 현상학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요컨대 무의식을 설명하는 것이 의식이고, 물질을 규정하는 것이 정신이기 때문이다. 양자는 서로 가역 왕래하고 있다. 그리고 권력을 해부하는 것이 이에 저항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끝없음은 이성의 끝없음과 다를 바가 없다.
유일신을 추구하는 서양 문화권에서 스피노자의 범신론은 범신론이 아닌 유물론(범재신론)에 이르고, 동일성을 추구하는 서양 문화권의 차이성은 차이성이 아닌 들뢰즈의 기계론(생성-기계)에 이르고, 유심론을 추구한 헤겔의 유심론은 마르크스에 의해 유물론으로 둔갑하게 된다. 유일-순수-절대를 추구하는 서양 문화권은 결국 자연에 대한 반동으로 인류를 멸종으로 빠트릴 것이다. 욕망(경험)-이성(신화)-권력(제도)-기계(기술)는 원형과 변형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적인 것이다. 그 원형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적 이성도 실은 욕망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존재(Being)는 생성(becoming)의 욕망(이성, 권력,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멸종을 맞지 않기 위해서는 서양 문화권이 주도하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자연을 추구하는 동양 문화권의 도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역설적 존재다. 서양의 동일성(실체론)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성과 욕망이 아닌 제3의 철학, 즉 눈과 머리에 의해 이끌어지는 ‘소유의 철학’이 아니라 귀와 신체에 의해 이끌어지는 ‘존재의 철학’, 즉 수신과 수도(수양)의 철학이 필요하다. 이성과 욕망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소유를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놓아버려야 한다. 소유를 넘어가는 것은 아직 다른 이성과 욕망이 기다리고 있음을 은폐할 수 있다.
요컨대 천국과 극락이라는 것도 이성과 욕망의 마지막 굴레(현상학적 굴레)다. 기억하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無憶, 無念) 그것마저 놓아버리는 것(莫妄)이야말로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길이고, 진정한 해탈에 이르는 길이다. 해탈은 기존의 것을 해체하는 것이 아니다. 해체는 다른 욕망의 그림자이다. 그런 점에서 해체철학자들, 후기 근대 철학자들의 요란한 철학적 역설과 제스처는 이성과 욕망의 은폐 혹은 기만이거나 변태(변태 성욕자)일 수 있다.
서양 철학의 동일성(동일률)은 개념으로부터 출발하였고, 모순율과 배중율과 총족이유율은 동일성의 다른 말이다. 동일성(동일률)은 처음부터 모순율(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서 변증법적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성은 보편성과 개체성과 실체성을 추구한다. 고정 불변의 존재, 즉 실체(힘, 권력)를 추구하는 서양문명은 욕망의 창조성(무한대), 창조의 악마성(소유적 존재), 유일신(절대주의)의 전체성, 자연의 도구성(이용효율성)을 토대로 구축된, 인간이 해석하고 자연으로부터 반전시킨 문명의 바벨탑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성경은 자연과 문명의 역설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사유와 존재(자연)를 뒤바꾼, 존재에 사유를 뒤집어씌운 서양의 근대 철학은 그대로 자연과학과 궤를 같이하는 철학이었다. 그 결과가 유물론, 기계론, 기계신(機械神), 인간신(人間神)인 것이다. 중세의 신을 반동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신이 된 인간신의 모습이다. 인간신-기계신의 정지는 인류의 멸종으로밖에 해결할 길이 없을 것인가?
생성 변화하는 존재를 현상이라고 규정한 서양 철학은 고정 불변의 존재(동일성)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서양 철학의 생기존재론은 현상학적 차원의 주체-대상의 존재론(실체론)에 불과하다. ‘주체-대상’의 대상은 대상 그 자체(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주체(나)가 본 대상이기 때문에 순수한 대상이 아니다.
‘주체-대상’의 주체 또한 대상을 통해서 드러난 존재기 때문에 순수한 주체가 아니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교차(가역 왕래)될 수 있는 실체다. 현상학적 이분법에서 주체와 대상은 실은 같은 것이다. 둘 다 실재(존재)를 기준으로 볼 때 허상(가상, 환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실체라고 하는 것은 모두 가상이다. 따라서 주체와 대상이 서로 자신을 실체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주체와 대상은 서로 지워질 수 있는 것이다.
서양 철학은 자연을 (존재로 보지 않고) 현상으로 보면서 현상의 이면에 고정 불변의 존재로서 본질(essence)인 이데아(idea)가 있다고 보았다. 이데아는 그런 점에서 현상(대상)의 이면에 종속된(subject to object) 존재로서 출발하게 되었는데 ‘subject’가 종속된 존재에서 주체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역전하게 된다. 그후 ‘subject’는 주체가 된다. 주체와 대상의 상호 가역 왕래는 서양 철학의 핵심 내용이 되면서 헤겔에 이르러 이것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드러나게 된다. 서양 철학에서 ‘sub(subject)-’는 ‘sup(supersubject)-’로 교차가 된다. 서양 철학에서 초월성과 내재성은 같은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에 의해 제안된 정신분석학이라는 것도 심층심리적 층위를 설정한 일종의 ‘수직적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 ‘수평적 현상학’이라면 말이다. 프로이트의 초의식과 의식은 현상학적 인식론의 주관적 초월(초월적 주관)에 부합하고, 무의식(Libido)은 사물(Id, It)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모든 현상학은 언어에 의해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현상학의 일종이다. 초월이든 내재이든,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모두 언어에 의해 존재(실재계)와 이미지(상상계)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꿈의 해석학이든 현상학적인 해석학이든 모두 라캉의 언어(상징계)해석학이다. 헤겔의 유심론은 입장을 바꾸면 마르크스의 유물론이다. 또한 주인은 노예가 된다.
대상(object)에 종속된(subject to) 것에서 출발한 주체(subject), 노예에서 출발한 주체는 계속적으로 초월적 주체(supersubject)로 새롭게 태어나는 한편, 대상은 영원한 대상(eternal object)으로 계속해서 무한대로 연장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상학이다. 이것이 니체에 이르러 운명애(Amor Fati)가 되고, 영원 회귀(eternal recession)가 된다. 이것을 서양 철학의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서양 철학의 이러한 특성을 두고 필자는 ‘현상학적 굴레’라고 말하였다.
서양 철학사에서 필자가 가장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하이데거(1889∼1976)와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 태어난 해가 1889년으로 같다는 점이다. 이에 더하여 히틀러(1889∼1945)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라는 말로 유명하다. 물론 논리실증주의자인 비트겐슈타인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의 경계를 긋기 위해 한 말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말할 수 없는 것’에 하이데거의 ‘존재’라는 개념을 대입하면 영락없이 통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와 존재의 세계는 서로 다른 문법의 세계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서양 철학과 문명사에서 일자(一者) 혹은 절대(絶對)에 대한 집념은 그야말로 시종일관(始終一貫)이다. 그런데 이 일자(一者)가 신(God)도 될 수 있지만 절대 군주, 그리고 전체주의도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자(一者)는 하이데거의 용어로는 ‘존재자’이지만, 라캉의 용어로는 대타자(Autre)다. 서양 문명에는 기독교자유주의도 있지만 기독교마르크시즘도 있다. ‘일자(一者)의 권력’은 때로는 전체주의로 돌변할 수 있음을 국가사회주의자(파시즘)인 히틀러와 공산사회주의자인 스탈린은 증명하고 있다.
서양 문명이 주도한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은 오늘날 인공지능(AI)과 사물 인터넷, 사이보그 인간, 기계 인간의 출현을 예고할 정도로 극단적 기술주의에 빠졌고, 이러한 고도 기술 사회를 다스리는 관료주의도 극한을 달리고 있다. 기술은 항상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의 미래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인류를 기술관료-전체주의로 몰아갈 위험마저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인간과 자연은 본래존재의 위상을 되찾아야 하는 시대적 사명에 있다.
자연은 본래 생성적 존재로 하나(一如)다. 서양 철학의 주체와 대상은 자연의 생성(생멸)을 존재로서 봄으로써 생성에서 존재를 각인시키는 메커니즘의 전통을 수립했다고 볼 수 있다. 변증법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후기 근대 철학의 차연(差延)이라는 것도 실은 차연의 변증법에 불과한 것으로 이름만 바꾼 것이다. 자연은 실은 본래존재로서의 하나인데 이를 이분함으로써 실체(허상)을 만든 것이 서양 철학이다. 결국 이 둘은 서로 하나가 되지 않으면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초월적 존재와 내재적 존재는 하나로 만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두고 우리는 신과 자연과 인간은 본래 하나라고 말한다. 본래 하나가 본래존재다.
서양 철학과 기독교는 고정 불변의 존재(Being)를 찾는 여정이었다. 이것은 생성(becoming)의 자연을 ‘존재’로 환원하는 매우 인간적인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현상학적 환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연의 사건, 즉 생성적 사건에 대한 서양철학과 문명의 해석이 현상학적인 차원에서 진행된 것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존재는 이데아, 유일신, 이성, 수학, 기계 등을 의미한다. 생성으로서의 자연적 존재는 이러한 것이 아니다.
서양 철학은 여성-되기, 동물-되기 등 ‘무엇-되기(being-becoming)’를 통해 생성을 포함하는 것처럼 하지만 전정한 존재, 본래존재는 그러한 개별적 존재자의 되기, 즉 ‘개별(individual)-되기’로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 되기는 잠시 시적(詩的)인 환상을 심어주지만 본래존재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는 아직 거리가 있다. 본래존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이 이해한(해석한) 존재가 아닌, 존재 그 자체, 생성적 존재이다.
필자의 한글 철학인 ‘알(알다)-나(나다)-스스로(살다)-하나(되다)’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생성(becoming) 철학을 기초로 한다. 반면 서양 철학은 존재(Being) 철학을 기초로 한다. 존재 철학은 일자(一者)를 추구하는 반면, 생성 철학은 일여(一如)을 추구한다. 생성이든, 존재이든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어떤 행위(사건)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하다(doing)는 모든 존재의 삶에 해당되는 것이다. ‘하다’는 존재에서 이루어지는 매우 존엄스러운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철학적으로 흔히 제조신(製造神)이라고 한다. 반면 천부경의 신은 조화신(造化神)이다. 제조신(製造神)의 창조하는 것도 하는 것이고, 조화신(造化神)의 변화하는 것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생성(becoming)-존재(Being)-하다(doing)라는 ‘존재 삼각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일하는 것(working)도 하는 것이고, 노는 것(enjoying)도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제조신은 현상학적인 신으로서 ‘창조-종말(有始-有終)’의 신이다. 천부경의 조화신은 존재론적인 신으로 ‘무시(無始)-무종(無終)’의 신을 말한다. 결국 이 책은 조화신을 되찾기 위한 철학적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제조신은 결국 기계신에서 그 정체를 드러내고, 조화신은 인간에서 자연(본래존재)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문명은 이데아의 동일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후기 근대 철학의 차이성이라는 것도 동일성의 이면 혹은 속임수이다. 동일성은 이분법과 개념을 낳고, 개념은 과학과 기계적 세계관을 낳았다. 번면 동양 문명은 음양의 상보성(상관성)을 기초로 하고 있다. 음양은 이중성과 상징을 낳고, 상징은 시(詩)와 의미적 세계를 낳았다. 기계는 ‘기표 연쇄(환유 연쇄)’로 의미가 죽은 것이고, 시는 ‘기의 연쇄(은유 연쇄)’로 무궁한 의미를 생산한다. 기계는 결국 도구(이용)고, 의미는 생명 그 자체다.
동서양 문명이 다를지라도 인간은 현상학적인 차원과 존재론적인 차원의 융합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 말은 제조신과 조화신의 융합과 화해가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를 개척하는 화두가 될 것이다. 존재론은 의식학(현상학)이 아니다.
존재는 존재 이유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유를 찾는 동물이다. 존재는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은 진리를 찾는 동물이다. 삶은 앎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앎을 찾는 동물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의미를 찾는 동물이다. 의미는 의식에 따라 있고 없음이 결정된다. 의식은 대상(목적)의식이어서 있음도 없음이 되고 없음이 있음이 된다.
‘알-나-스스로-하나’는 필자의 한글 철학의 핵심 사상이다. 이것을 동사로 풀어쓰면 ‘알다-나다-살다-하나 되다’가 된다. 이것은 불교의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四聖諦처럼 필자의 철학을 네 자로 푸는 진언과도 같다. 인간이 부모로부터 ‘생명(알)’을 타고 ‘나’로 태어나서 ‘스스로’ 삶을 개척하고 끝내 삶의 완성으로서 세계와 하나가 되는 것 혹은 하나의 세계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니체가 말하는 도덕과 동양의 도덕은 다르다. 서양의 도덕道德에는 뒤에 본질처럼 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동양의 도덕에는 도학道學이 있다. ‘힘의 도덕’과 ‘도학의 도덕’은 그 근본에서 다르다. 도학은 자연을 이용하되 자연과 공생하는 도학이다. 힘의 도덕은 인위人爲의 도덕, 유위有爲의 도덕이라면 도학의 도덕은 무無의 도덕, 무위無爲의 도덕이다.
니체의 의지는 ‘힘의 증대’라는 하나의 방향을 잡고 있는 의식적·의미적이라면, 기운생동은 일정한 방향성이 없는, 사방으로 운동하는 무의식적·무의미적인 특징이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정진
▲한양대학교 의과대학 의예과 수료 ▲한양대 문리과대학 국문과 졸업 ▲영남대학교 대학원 문화인류학과 박사 학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 ▲세계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 평화연구소장 역임 ▲월간 『현대시』 신인상으로 시단에 등단 ▲「시를 파는 가게」, 「대모산」, 「독도」, 「타향에서」 등 12권의 시집을 펴냄 ▲현대시회 2대 회장(1997년) ▲서울문예상(2006년, 강남구) 수상 ▲울릉도 독도박물관에 「독도」, 서울 강남구 대모산에 「대모산」, 경기도 연천군 ‘종자와 시인’ 박물관 시공원에 「타향에서」 시비 세움 ▲『한국문화와 예술인류학』을 비롯해서 시집을 포함 120여 권의 저서 ▲天正宮 ‘THINK TANK 2022 정책연구원’ 소장.
목차
서문
1. 서양 철학의 종언
1.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적인
― 니체, 문명의 해체와 힘에의 복귀
1. 생기존재론生起存在論: 생성론인가, 존재론인가
2.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의 세계’와 니체 ‘힘에의 의지’
3. 니체의 영원 회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4. 힘에의 의지는 현상학인가, 존재론인가
5. 니체는 허무주의를 극복했는가?
6. 존재 철학, 생성 철학: 남성 철학, 여성 철학
7. 유라시아(인도유럽어) 문명의 관점에서 본 쇼펜하우어와 니체
1) 자기 투사의 철학: 서양 철학 내의 결여와
필요, 이성과 의지와 욕망
2) 니체 ‘힘에의 의지’: 실체의 확대 재생산
3) 과학적 제도: 가부장과 동일성의 존재·허상·우상
4) 인간은 자기 투사적-자기 최면적-자기 도착적 존재
8. 니체를 넘어서, 화평부동론和平不同論의 세계
1) 일반성의 철학과 화평부동론
9. 니체를 통해 서양 철학을 비판하다
1) 해석학적 인식과 음양(상징)해석학
2) 유시유종有始有終과 무시무종無始無終
2. 들뢰즈의 욕망과 도착, 기계주의
― 세계 전체를 물질과 기계로 본 대뇌적 환상의 미로
1. 들뢰즈의 현대 철학적 의미와 반성
2. 들뢰즈의 노마드-리좀학에 대한 온정적 이해
3. 들뢰즈 철학에 대한 존재론적 반론 50항목
3. 데리다, 해체주의와 평론적 철학, 그리고 표절
― 남의 철학에 대한 평론이 자신의 철학은 아니다
1. 현상학: 신God, 정신Geist, 유령Ghost
2. 현상학을 벗어나는 신체적 존재론
3. 베르그송의 시간은 의식의 생성
4.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불임의 철학
― 대뇌는 거짓말을 좋아한다
5. 소리에서 포노로지Phonology 의 탄생
1) 말-소리중심주의logo-phonocentrism의 착오
2) 하이데거와 데리다 이해의 혼선과 비판
― 데리다의 시간론과 현상학적 존재론의 모순
4. 하이데거, 존재론과 서양 철학의 한계
― 세계-내-존재에서 존재-내-세계로
1. 서양 철학에 대한 근본적 반성
2. 서양 문명의 절대성과 실체성에 대한 반성
3. 서양 철학의 ‘초월-추상-기계’를 넘어서야
4. 하이데거의 사방 세계와 『천부경』
5. 불교 화엄학과 하이데거 존재론 비교
2. 서양 철학과 문명에 대한 반성과 전망
1. 물신 숭배에서 신물 숭배로
― 동일성과 차이성, 자연주의와 평화
1) 물신-기계 시대의 인간 소외
2) 인간은 지혜로운 존재인가?
3) 서구 보편성의 한계와 종말
2. 평화에 대한 현상학과 존재론의 역동성
― 서양 철학과 기독교는 불교에서 구원을 찾는다
1) 역사현상학의 불안전한 평화
2) 불교적 존재론의 평화
3) 철학의 미래와 네오샤머니즘
― 신인간神人間과 신물神物의 회복을 위한 철학적 기도
3. 여성 철학과 존재론
1) 현상학으로서의 남성 철학과 존재론으로서의 여성 철학
2) 자유는 사유-합리-기계가 아니라 생명-신체-존재의 문제다
3. 한글 철학의 탄생
1. 한글은 세계 언어의 모어母語다
1) 한글의 원소리, 아A, 안AN, 알AL
2) 한글의 원형적 세계관
― 소리를 통해 본 인류 문화의 원源 소리
3) 한글의 육원음六原音과 육하원칙六何原則
4) 한국어의 기원, 홍산紅山 문화
2. 순우리말 철학: 알-나-스스로-하나 718
1) ‘알-나-스스로-하나’의 순우리말 철학
2) 위인성신爲人成神:자신自身-자신自信-자신自新-자신自神
3) 순우리말 철학과 천지인·원방각·아리랑
3. 삶(생명, 존재)과 앎(이용, 지식)의 고고학
4. ‘하나’와 ‘한’과 ‘하나님’의 상징성에 대하여
5. 철학의 십계명
6. God, Geist, Ghost에서 하나님주의Godism으로
추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