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거란의 지배를 받던 일개 변방 부족인 여진은 아골타의 탁월한 리더십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역량을 모아 가공할 전투력을 갖춘 집단으로 거듭나게 된다. 거란의 천경 4년인 1114년 겨우 2천의 기병으로 처음 궐기한 여진은 단 14년 만에 거란과 송이라고 하는 당시 세계 최강의 두 강대국을 연이어 멸망시키기에 이른다. 왜 빼어난 군사력을 갖춘 거란과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에 1억 2천만 명의 인구를 가진 강대국 송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었을까? 서몽신은 휘종과 흠종, 그리고 고종 등 세 황제가 북쪽의 금조와 추진한 맹약과 그로 말미암은 송의 멸망이란 처참한 결과를 복원하기 위해 현장 기록으로부터 첩문, 조서, 국서와 같은 공문서까지 다양한 문서를 수집하여 모두 150만 자에 달하는 망국의 기록을 남겼다. 우리는 이 처절한 기록을 통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본 역서는 중국과 일본 학자들도 손대지 못한 난해한 판본을 꼼꼼하게 교열한 뒤 치밀한 번역과 상세한 각주를 통해 12세기 전후의 역사상을 복원한 연구서로 한국의 중국학 수준을 과시할 수 있는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 리뷰
동아시아를 하나로 아우르는 방대한 문화권을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한 당조(唐朝)는 안사安史의 난 이후 번진(藩鎭)의 난립으로 약해지다가 황소(黃巢)의 난으로 치명타를 입고 주전충(朱全忠)의 후량(後梁)에게 망하게 되면서, 대륙은 오대십국의 분열기를 맞게 된다. 그 가운데 오대의 세 번째 왕조인 후진(後晉)의 석경당(石敬?)은 제위에 오르기 위해 거란의 도움을 받고자 현 북경(北京)과 대동(大同)을 중심으로 하는 연운 16주(燕雲十六州)를 거란에 할양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할양해 준 연운 16주는 이후 송조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오대십국의 분열상은 송조의 통일로 표면상 종결되었지만, 송의 국세는 당조만 못하였다. 북방의 거란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압박하는 상황에 더해 서북부에 서하(西夏)가, 티베트에 토번(吐蕃)이, 운남에 대리(大理)가 새로 들어서면서 10세기 동아시아는 거란과 송의 남북 관계가 중심축으로 작동하고 동쪽의 고려와 서쪽의 서하가 횡축을 형성하며, 토번(吐蕃)과 대리(大理)가 또 다른 보조축을 형성한 보기 드문 다자간 각축전의 무대가 되
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은 1005년 거란과 송이 전연(?淵)의 맹약을 체결하면서 일단락되어 110여 년에 걸친 장기 평화라는 새로운 국면에 진입하였다. 전연의 맹약은 거란에게는 물론 송조에게도 매우 긍정적인 외교적 성과물이었다. 장기적인 군사 외교적 안정이 송조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었고, 논란의 중심에 있던 세폐 부담도 국방비의 규모에 비하면 결코 과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합리적인 논증에도 불구하고 ‘전연체제’는 중화사상에 매몰된 송조 사대부에게 늘 굴욕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세폐가 곧 조공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과 통일제국으로서의 영토적 불완전성을 공인했다는 점이 바로 그 핵심이었다.
송의 통치자는 자기 왕조가 한과 당처럼 명실상부한 통일제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장성 이남의 영토를 온전히 장악하고, 북방 유목민에 대한 최소한의 군사적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군사적 열세가 현 장성 일대에 해당하는 연운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상실한 데 있고, 세폐는 그 지역을 포기한 데에 따른 결과물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연운 지역 포기를 공식화한 전연체제의 극복이야말로 송조가 달성해야 할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를 달성하려면 중문경무(重文輕武)를 표방한 ‘조종지법(祖宗之法)’을 손봐야 했고, 왕안석의 신법이 바로 그러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많은 논란 끝에 추진한 신법은 서하와의 전쟁에서 대패함으로써 무위로 돌아갔고, 신종(神宗)이 급서하자 이런 일련의 상황에 대한 책임을 둘러싼 내부 갈등은 커져만 갔다. 이런 상태에서 송조는 예상치 못한 금의 갑작스러운 흥기와 거란의 급속한 쇠퇴라는 상황을 맞이하면서 여진과의 동맹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이때 송조가 채택할 수 있는 방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거란을 도와 여진을 평정하고 우호를 굳건히 유지하면서 반대급부로 연운 16주 할양을 요구하는 것이다.
둘째는 여진을 도와 거란을 멸하고 연운 16주를 취하는 등 거란의 옛 영토를 여진과 나누는 것이다.
셋째는 거란과 여진을 공존시켜 북방 세력을 양분하여 송조가 상대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 선택지는 송조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는 군사력이 없었기에 실현성이 떨어지는 이론에 불과하나, 결과적으로 송조는 새로운 강적을 도와주는 최악의 선택지를 고르는 우를 범하였다. 이런 선택에는 송의 황제독재체제가 지닌 약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자신을 도교의 신으로 자처하는 등 현실 감각이 결여된 채 근거 없는 공명심과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에 매몰되었던 휘종(徽宗)은 금과 동맹을 체결하여 연운 지역을 회복함으로써 불세출의 대업적을 이루길 소망하였다. 부패에 물든 집권층 역시 휘종의 욕망에 부응하여 아전인수적인 정세분석을 제시하며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였다. 물론 송의 집권층은 자체 군사력이 취약하므로 연운 한인(漢人)의 내응이 필수이나 그들을 신뢰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급변하는 거란과 금의 관계를 방치할 경우, 연운 회복의 기회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과 대신들의 이기적인 공명심이 더해져 결국 송금동맹이 체결되었다.
자체 역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제3자에 의지하여 거란을 멸망시키고 연운 지역을 점령한다는 송조의 전략은 사실상 국운을 건 한판의 도박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휘종을 비롯한 집권층은 거란과 금의 역량과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했고, 개인적 안위와 이익에만 연연하던 기회주의자들을 자신의 우호 세력이라고 간주하는 우를 범하였다. 이처럼 요행을 바라는 정책 결정자들과 기회주의자와의 결합에 더해 문제를 악화시킨 것은 송군의 전투역량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형편없었다는 점이다. 송군은 멸망을 눈앞에 둔 거란의 잔여 세력조차 제압하지 못하였다. 군사적 무기력은 송의 협상 카드를 전면 무력화하였으며, 힘의 불균형을 밑바탕에 깔고 맺어진 금과의 동맹은 송군의 거듭된 패배로 더욱 균형을 상실하였다.
흠종(欽宗)은 전례 없는 국난을 맞아 시종 좌고우면하였으며, 보좌진 역시 상황을 반전시킬 역량을 갖추지 못한 채 상황이 악화될수록 고식책(姑息策)에 집착, 문제를 더욱더 악화시켰다. 원래 송의 관료는 과거를 통해서 선발된 가장 우수한 엘리트 집단이었으나, 휘종 대에 이르러 환관 세력과 결탁하며 보여 준 모습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형편없었다. 뛰어난 지적 수준과 극도로 저열한 인격의 부조화는 결국 송조를 절망적인 상황으로 이끌고 말았다.
금의 예상치 못한 거병부터 거란의 멸망을 거쳐 송의 멸망까지 소요된 시간은 채 14년이 걸리지 않았다(1114~1127). 북아시아를 제패하고 있던 막강한 유목제국 거란과 1억 2천만의 인구를 지녔고 경제적으로 승승장구하던 강대국 송이 국가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일개 부족에게 동시에 멸망당한 것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다. 이에 혹자는 금의 굴기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영적 팽창’ 같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역사의 미스터리라고 할 정도로 예상 밖의 사건이었던 거란과 북송의 멸망, 금의 흥기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키가 바로 서몽신(徐夢莘)의 『삼조북맹회편』이다. 서몽신은 25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통해 여진과의 동맹 체결에 대한 논란, 전쟁의 진행 과정, 당시 인물에 대한 평가 등을 총체적으로 담아냈고, 여진 관련 초기 사료도 잘 보존하였다. 서몽신은 북벌론에 대하여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신의 견해와 판단을 직접적으로 피력하는 대신 제3자의 말을 그대로 수록하여 독자에게 판단과 평가를 위임하는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전통을 견지하였다. 그 결과 『삼조북맹회편』에는 상반된 사료가 다량 수록되어 다소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사료의 신뢰성은 높이 평가받는다. 한편 『삼조북맹회편』은 많은 화자의 말과 글을 그대로 인용하였으므로 그 안에 당시의 언어적 특성을 담은 어휘와 초기 백화(白話)의 형태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하다. 그래서 『삼조북맹회편』은 역사서임과 동시에 한어사(漢語史) 연구의 보고로 주목받기도 한다. 이런 점은 아래 「해제」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사가에게 있어 망국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작업은 없을 것이다. 서몽신은 자존심 상하는 교섭의 과정과 망국의 참담한 상황을 통해 당시 송조가 처했던 상황이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불가항력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서몽신은 제아무리 뛰어난 지식이 있더라도 정직성과 결단력이 결여되면, 그리고 이기심에 사로잡히면 얼마나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말해 준다. 아무리 많은 군대와 무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용기와 희생이란 품성이 없이는 모든 것이 무용하다는 사실도 말해 준다. 특히 권력자가 유의해야 할 것이 바로 허위의식과 공명심에 매몰되는 것임도 거듭 강조한다.
『삼조북맹회편』의 판각과 인쇄에 앞장선 허함도(許涵度)와 원조안(袁祖安) 등 청말의 학자들이 보여 준 지식인으로서의 태도 역시 서몽신에 못지않게 감동을 안겨 준다. 청말의 국난 속에서 오히려 굴욕의 역사를 반추함으로써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설 수 있는 방략을 모색하였던 역사학자들의 치열함과 그 용기가 각별하기 때문이다.
『삼조북맹회편』이 이처럼 중요한 문헌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판본조차 본격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것은 한마디로 말해 너무 방대하고 난해하기 때문이다.
난해한 이유는 크게 네 가지이다. 첫째는 책이 완성된 이래 600년 이상 필사본으로 전해지면서 여러 종류의 필사본이 출현하였다. 여러 필사본을 비교하면 더욱 합리적인 기록을 찾을 수도 있지만, 문장의 완결성이 떨어지거나 불완전한 묘사 등이 적지 않다. 둘째는 너무나 다양한 문체의 문서를 다루고 있다. 극도로 현학적이며 전고를 찾기 어려운 조서(詔書)류의 문장부터 당시 북방에서 통용된 이른바 한아언어(漢兒言語)의 문장까지 다양한 문체의 문서가 혼용되어 있다. 셋째는 여타 문헌에서 흔히 보이지 않는 지명·인명·관명을 비롯해 천문·지리·역법은 물론이고, 전투 방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과 사안이 포함되어 있다. 넷째는 수록된 사건이 여타 문헌에 등장하지 않거나 서로 다른 각도에서 기술되어 방증 자료를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 연구팀이 『삼조북맹회편』 연구를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이다. 2005년, 한어사(漢語史) 연구에서 『삼조북맹회편』이 지닌 중요성에 착안하여 박영록 교수가 국내외 한어사 연구자와 소규모 팀을 조직하여 “『삼조북맹회편』의 송대 언어 특징에 대한 기초연구”라는 제목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소규모 공동연구지원 사업에 선정된 것이 지난 19년간의 항해를 시작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2005년 12월 6일에 시작된 윤독회는 2021년 4월 17일까지 모두 155회가 진행되었고, 2021년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사업에 선정된 뒤로는 3년 동안 매주 줌 회의 방식을 통해 번역물을 공유하고 검토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사이에 송금원시대사 연구자, 중국어사 연구자, 중국문학 연구자 등 3개 영역에서 다양한 연구자들이 이 연구모임을 거쳐 갔는데, 1년 이상 참여한 연구자만도
23명에 이른다.
19년에 걸친 긴 항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치지 않고 꾸준히 노를 저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일본 학자들도 이루지 못한 『삼조북맹회편』의 판본 교열과 번역을 최초로 달성하려는 학문적 열정과 각별한 우정이 우리 연구팀에게 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도움과 격려, 배려를 아끼지 않고 어려울 때마다 징검다리를 놓아 준 많은 동학(同學), 그리고 가족들의 배려 덕분이다. 250권 가운데 70권의 번역을 마친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직 멀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역자 후기’를 쓸 수 있는 감격스러운 날을 꿈꾸며 감사의 말씀을 뒤로 미룬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서몽신
남송 때의 사람으로 자(字)가 상로(商老)이며 강남서로(江南西路) 임강군(臨江軍) 청강현[淸江縣, 현 강서성 의춘시(宜春市) 장수시(樟樹市)] 출신이다.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경전과 사서, 소설에 이르기까지 탐독하였는데, 탁월한 암기력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현지 실정에 맞는 정책을 소신에 따라 추진하였으며 그로 인한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한 인물이었다.서몽신은 『삼조북맹회편』 외에도 『북맹집보(北盟集補)』, 『회록(會錄)』, 『독서기망(讀書記忘)』 등의 저작이 있다고 하나 모두 실전(失傳)되고 현재는 『삼조북맹회편』만 전해지고 있다.
목차
머리말
해 제
범례 : 요약
제7권
선화 4년(1122) 5월 18일 을해일~ 6월 3일 경인일
제8권
선화 4년(1122) 6월 3일 경인일~ 6월 12일 기해일
제9권
선화 4년(1122) 6월 24일 신해일~ 9월 23일 기묘일
제10권
선화 4년(1122) 9월 27일 계미일~10월 20일 을사일
제11권
선화 4년(1122) 10월 23일 무신일~11월 27일 임오일
제12권
선화 4년(1122) 12월 2일 정해일~12월 15일 경자일
제13권
선화 5년(1123) 1월 1일 을묘일~1월 27일 신사일
제14권
선화 5년(1123) 2월 1일 을유일~2월 28일 임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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