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 홍재덕
1936년 일제 암흑기에 태어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德泉古典硏究所와 韓國族譜文化硏究院을 운영하면서 오직 한학자로서의 외길을 걸어왔다.1990년에 『南陽洪氏遡源錄』을 시작으로,2001년에는 『南陽洪氏族譜』 전 5권을 편술하고,2005년 『韓國姓氏總監』 編輯委員長으로 우리나라 성씨를 총망라하는 3,300쪽 분량의 총감 상하권을 편집·발행하였다.2011년에는 『성경의 족보』를 저술·출판하였다.2014년에 『大同文化硏究』 제86집에 「元曉大師의 悟道說話에 대한 硏究」를 발표한 바 있다.2018년에는 본고의 일부인 비문의 변조설과 논쟁에 대한 논문을 저술하였으나 자료의 미비로 출판하지 못하고 새로운 자료를 수집·보강하여, 한·중·일 삼국의 연구자들이 130년 동안이나 논쟁을 벌이고 있는 난제를 명쾌하게 해석함으로써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출판하는 것이다.
광개토왕비문 논쟁에 대한 종결선언문
제1장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의 진실
1. 비의 건립과 재발견
1) 광개토왕능의 설치와 비의 건립
2) 만주 지역의 봉금제 실시
3) 봉금해제와 회인현懷仁縣의 설치
4)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재발견 경위
5) 광개토왕릉廣開土王陵의 소재지
6)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의 명칭
7) 비의 형태
제2장 초기의 탁본
1. 제1차 탁본拓本
1) 관월산關月山의 동정
2) 관월산關月山의 수탁수자手拓數字와 전체 탁본
[표 1] 현의 설치 이전에 발견했다는 자료
[표 2] 비의 재발견에 대한 자료
(1) 이초경李超瓊의 발문
(2) 이초경李超瓊의 요좌일기遼左日記
2. 제2차 탁본拓本(『회여록』에 수록된 비문)
1) 성경장군 좌씨설(천진탁공 4인설)
2) 진사운陳士芸의 탁본설
3) 오대징吳大徵의 『황화기정皇華紀程』
4) 영희榮禧의 탁본설
3. 제3차 탁본拓本
1) 반조음潘祖蔭本 광서 11년(1885년)
(1) 섭창치葉昌熾의 발어跋語
(2) 장연후張延厚의 발어跋語 1885년
4. 제4차 탁본拓本(1889년, 盛昱본 劉承幹 崔右年의 跋)
1) 유승간劉承幹의 발문跋文: 『海東金石苑補遺』 1922年
2) 최우년崔右年의 발문跋文
3) 오중희吳重熹의 『고구려호태왕비석문 찬고후발』
5. 탁본의 유형별 탁본 시기
1) 초기의 탁본에 대하여
6. 탁본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경위
1) 비문이 우리나라에 최초로 알려지는 과정
2) 계연수桂延壽의 탁본
3) 『황성신문』의 기사(「遊帝室博物館 관람기」)
4) 1905년 10월 31일 자 『황성신문』의 기사
5) 광개토왕비문이 최초로 수록된 문헌
제3장 광개토왕비문에 대하여
1. 비문의 실체
1) 비의 실체에 대하여
2) 비문의 문체 구분
2. 광개토대왕비의 원문廣開土王碑의 原文
1) 비의 원문
2) 고문으로 작성된 부분
3) 今文으로 작성된 부분
4) 파손된 글자가 많아 기타로 처리
5) 今文으로 작성된 부분
6) 고문으로 작성된 부분
7) 今文으로 작성된 부분
[표 3] 비문의 행별 자구수 및 오기 파손된 글자
[표 4] 今文의 字句 통계표
3. 비문의 번역에 대하여
1) 번역에 대하여
[표 5] 書頭 20자에 대한 번역문
4. 광개토왕비문 역주문
1) 제1면의 번역문
2) 제2면의 번역문
3) 제3면의 번역문
4) 제4면의 번역문
5. 결자에 대한 필자의 復元
1) 결자 복원에 대한 서론
2) 來渡海破[來] 百殘[]의 공란에 대한 필자의 복원
3) 필자가 교정 복원한 문자와 번역문
[표 6-1] 필자가 복원한 글자 (고딕체)
[표 6-2] 필자가 복원한 글자 (고딕체)
6. 비문의 난해한 글자
1) 변조된 난해 문자
2) 廣開土王 諡號의 자에 대하여
3) 주구신라住救新羅의 주[住] 자에 대하여
4) ‘釋文’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제4장 비문변조와 참모본부
1. 일본의 정세와 탁본 입수
1)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과 밀정 파견
2) 주구경신酒勾景信의 첩보활동 기간
[표 7] 주구경신酒勾景信의 약력
3) 1884년 5월설은 조작된 가설이다
[표 8] 1884년 12월 이전에 저술된 논문
4) 탁본을 최초로 가지고 간 자의 이름
[표 9] 탁본을 참모본부에 최초 전달한 자
2. 쌍구가묵본의 초기 유행에 대하여
1) 초기에 쌍구가묵본이 유행된 것은 중대한 사건이다
2) 천진탁공 4인설의 정체
3) 수십 차 독촉에 대한 의미
4) 쌍구가묵본이 만들어지는 과정
3. 천진탁공 4인설은 위설이다
1) 쌍구가묵본은 비문변조를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다
2) 원석탁본은 모두 소각되었을 것이다
4. 『회여록』의 출판
1) 탁본 입수부터 『회여록』이 출판되기까지의 비밀
[표 10] 『회여록』 발표 이전에 작성된 자료 (1884~1888년)
[표 11] 酒勾景信이 참모본부장 大山巖에게 보낸 서신
2) 왜구가 자기들을 유리하게 하고 고구려를 폄훼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변조한 글자
[표 12] 변조 또는 삭제한 글자
5. 『회여록』의 4대 악서
1) 『회여록』에 수록된 4대 악서
2) 제1의 惡書 「고구려 고비문」 사진석판본(쌍구가묵본)
3) 제2의 악서惡書 「고구려비高句麗碑 출토기出土記」
4) 제3의 악서 「고구려高句麗 고비고古碑考」
(1)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에서 문제 항목에 대한 해설
(2) 비문의 발취문
5) 제4의 악서惡書 「고구려고비석문古碑釋文」
6. 비문변조의 주모자
1) 비문변조의 주모자는 횡정충직橫井忠直이다
2) 특정 비문의 변조자 비교 검증
[표 13] 특정비문의 변조자 집계표
7. 任那日本府說
1) 임나일본부설의 변조 과정
[표 14] 來百殘에 대한 일본인들의 주장
[표 15] 3차에 걸쳐 변조한 글자
(1) 비문의 원문
(2) 변조된 비문
2) 왜구들의 침입은 도적질이 목적이다
제5장 비문변조설
1. 변조설의 제기
1) 비문변조설의 제기
2) 최초의 비문변조설
3) 비문의 오자誤字는 화란火亂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4) 변조된 글자의 수
[표 16] 비문의 변조자 수에 대한 각자의 주장
5) 서평자들의 서평에 대하여
6) 변조자의 판단은 잔획이 아닌 문맥으로 해야 한다
[표 17-1] 제1~2면 正誤字 추종실태
[표 17-2] 제3~4면 正誤字 추종실태
7) 정오자의 판단은 4자성어로 확인해야 한다
[표 18] 변조자 문자 구성의 고증
[표 19] 국내 소장 탁본의 誤記字 실태
2. 변조에 대한 한중일 3국의 주장
1) 한국 측 주장
(1) 李進熙 씨가 주장하는 변조설
2) 일본 측 주장
(1) 일본 측의 반론
(2) 日本 측에서 변조설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증언들
3) 中國 측의 주장
(1) 榮子平의 증언: 『朝鮮上古史』 191쪽
(2) 경철화耿鐵華 『광개토왕비 신묘년 구절의 고증과 해석』, 1992년, 430쪽
(3) 林基中 徐建新이 발견한 탁본
제6장 비문에 대한 논쟁
1. 신묘년조의 쟁점
1) 辛卯년조에 대한 논쟁
2) 신묘년조의 기본 문장
[표 20-1] 辛卯年條의 기본 문장 원문
[표 20-2] 辛卯年條의 기본 문장 번역문
3) 신묘년조의 범위는 旋師還都까지 327자다
2. 신묘년조의 본질과 문체
1) 신묘년조의 본질
2) 신묘년조의 문장 구성
3) 비문의 서체에 대하여
3. 문체에 대하여
1) 비문의 문체에 대하여
2) 문체의 변천 과정
[표 21] 문체의 변천 과정
4. 신묘년조의 쟁점
1) 비문에 대한 논쟁의 원인
2) 비문논쟁의 8대 쟁점
5. 8대 쟁점에 대한 해설
1) 구시속민舊是屬民 유래조공由來朝貢에 대하여
2) 이왜이신묘년而倭以辛卯年에서 ‘而’ 자에 대하여
3) 래도해파來渡海破에 대하여
4) 百殘破倭에서 ‘破倭’ 자를 삭제(□□)한 것에 대하여
5) 以爲臣民에서 ‘以爲’에 대하여
[표 22] 以爲에 대한 번역문 사례
6) 신묘년조의 32자설
7) 以六年丙申에서 ‘以’ 자에 대하여
8) 王自誓 永爲奴客에 대하여
[표 23] ‘歸王自誓 永爲奴客’의 번역
[표 24] 궤왕사서 여위노객의 번역
6. 來渡海破에 대한 추가 해설
1) 래도해파來渡海破에 대한 추가 해설
[표 25] 來渡海破와 百殘□□에 대한 韓國의 주장 (年度順)
[표 26] 來渡海破와 百殘□□에 대한 日本의 주장 (年度順)
2) 래도해파에 대한 李進熙의 비판
3) 來渡海에 대한 金錫亨 씨의 비판
4) 비문논쟁의 핵심문제에 대한 해석
[표 27-1] 첫 구절의 구두점을 2자에 찍는 경우
[표 27-2] 첫 구절의 구두점을 6자에 찍는 경우
[표 27-3] 첫 구절의 구두점을 7자에 찍는 경우
[표 27-4] 첫 구절의 구두점을 7자에 찍는 경우 (북한)
[표 27-5] 첫 구절의 구두점을 8자에 찍는 경우
[표 27-6] 첫 구절의 구두점을 9자에 찍는 경우
[표 27-7] 첫 구절의 구두점을 10자에 찍는 경우
[표 27-8] 첫 구절의 구두점을 7자에 찍는 경우 (중국)
[표 27-9] 첫 구절의 구두점을 9자에 찍는 경우 (일본)
[표 27-10] 신묘년조 문자구성 통계표
5) 古典에서의 來渡海의 用例
(1) 『後漢書』 권115, 東夷列傳 倭人條(440년경 편찬)
(2) 『三國志』 권30 魏書 권30, 東夷傳 倭人條(290년경 편찬)
(3) 『通典』 邊防一 東夷上 倭條(801년 편찬)
6) 신라에서 조공한 사실
제7장 왕건군 씨의 주장에 대하여
1. 래도해파에 대한 해석
1) 비문에 대한 왕 씨의 해석
2) 래도해파來渡海破에 대하여
2. 신묘년조의 8대 쟁점에 관한 왕씨의 해석
1) 신묘년조의 8대 쟁점이란
2) 구시속민舊是屬民 유래조공由來朝貢에 대하여
3) 이왜이신묘년而倭以辛卯年에 대하여
4) 래도래파來渡海破에 대하여
5) 이위신민以爲臣民에 대하여
6) 이육년병신以六年丙申에 대하여
7) 王自誓 永爲奴客에 대한 해석
3. 난해한 글자에 대하여
1) 주구신라住救新羅에서 住 자에 대하여
2) 일팔성壹八城과 영팔성寧八城에 대하여
4. 신묘년조의 명칭말살기도
1) 辛卯年條의 명칭에 대하여
2) 辛卯年條의 名稱말살기도에 대하여
5. 초천부 씨에 대한 왕 씨의 주장
1) 기록에 의한 초천부의 인물
2) 왕 씨가 주장하는 초천부의 비문변조설
初鵬度의 증언
關野貞의 소감 기사
6. 쌍구가묵본에 대하여
1) 쌍구가묵본이 최초로 만들어진 경위
2) 쌍구가묵본의 제작에 대한 왕 씨의 주장에 대하여
3) 왕 씨의 주장에 대한 총평
제8장 고구려의 왕릉과 비의 고증
1. 왕비에 대한 고증
1) 비문 하단의 기사로 광개토왕비 확인 가능
2. 국내성의 주산과 국강상의 위치
1) 주산과 국강상國上의 위치
2) 광개토왕릉廣開土王陵의 소재지
(1) 古書에 기록된 왕릉의 위치
3) 우산하 540호분에 대한 고증
4) 540호분의 규모에 대하여
3. 훈적비와 주변의 능묘와의 관계
1) 태왕릉과의 관계
(1) 태왕릉의 피장자는 동천東川王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2) 장군총과의 관계
(1) 장군총의 피장자는 고국원故國原으로 비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4. 왕호와 장지와의 관계
1) 각 왕릉의 비정에 대하여
2) 장지명과 왕호에 대하여
[표 28] 국내성시대 왕릉의 소재지
[표 29] 고구려 평양시대 왕릉의 소재지
5. 역대 왕릉의 소재지
1) 동명왕릉의 소재지
2) 유리명왕릉의 소재지
3) 제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장지에 대하여
4) 제10대 산상왕의 능
5) 제11대 동천왕東川王의 장지에 대하여
6) 제12대 중천왕릉에 대하여
7) 제13대 서천왕릉에 대하여
8) 제14대 봉상왕릉에 대하여
9) 제15대 미천왕릉에 대하여
10) 제16대 고국원왕릉에 대하여
6. 고분군의 분포지구
1) 고분군의 분포지구 설정에 대하여
[도 1] 왕릉과 묘역의 위치도
2) 국내성의 주산과 계룡산 신도안의 주산
7.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1)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구려 유적
[표 30]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광개토왕비 1기
[표 31]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산성 3기
[표 33]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왕릉 11기
[표 33]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한 귀족묘 26기
[표 34] 북한에 현존하는 고구려유적
8. 광개토왕비와 장군총과 태왕릉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1) 광개토왕비의 파괴공작
[도 2] 광개토왕비각과 태왕릉을 통과하도록 설계된 도로
2) 장군총의 파괴공작
[도 3] 장군총을 통과하도록 설계된 도로
제9장 비문 연구의 140년사
1) 서 론
2) 비문 연구 140년사
3) 광개토왕비에 관한 저술현황 [표 35-1~15]
결 론
참고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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