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역사의 대지 위에 펼쳐진 견고한 시편들그의 젊은 날의 시 쓰기가 사적(私的)이거나 가족적인 성취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대동 세상을 꿈꾸는 민중주의적 열망을 가꾸는 무기였음을 알겠다. 그랬던 그가 세상 사람들은 그만두고 “사랑하는 이들의 어깨에 얹힌 짐”(「견고한 기억」)부터 걷어내겠다는 핑계를 대고 끝내 등 돌리고 말았던 사실을 떠올려보면, 당시 그의 시 쓰기라는 살로 겨눈 과녁이 보통은 훨씬 넘어서는 수준의 공포에 닿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리고 예의 저 「이인모」에 와서야 비로소, 자신이 가졌던 ‘푸른 사상’의 밑바닥에 도서관 6층에서 투신했던 김태훈 열사의 죽음이 가로놓여 있었음을 무심한 듯 툭 고백한다. (중략)
그의 탐색은 이제 두 가지 경로를 밟는다. 그중 하나가 시간의 종축을 따라 자기 시가 가닿아야 할 역사적 근원을 확인하려는 노력이다. 두 번째는 시간 여행에서 얻은 인식을 바탕으로 내 가족을 넘어 이웃의 목숨 가진 모든 것들에로 관심을 확산하는 횡단 탐색에 해당한다.
그의 종단 여행이 아버지와 어머니, 고모, 아내와 같은 가족들과의 관계 탐색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그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탐색을 통해 그는, 자기를 시대 앞에 비겁한 가장(家長) 되는 길로 일찍 내몰아 자주 대들었던 아버지의 무능이 사실은 아버지 시대의 것이었음을, 가족의 신산과 고통이 한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절을 살아낸 모든 가족들의 공동 문젯거리였음을 확인하려 한다. 시 「아버지의 녹」 「호국원 가는 길」에서 아버지와 화해를 한 그가, 「깜장 고무신」을 통해 우리 시대 모든 아버지의 ‘깜장 고무신’을 부끄러움 없이 납득하게 되는 과정이 정겹다.
아버지에게서 장인, 그리고 모든 아버지들에게로 연민의 감정을 점점 넓혀간 끝에 「아포 고모」 「텃밭 가는 길」의 어머니, 「아내에게」의 아내 등을 보듬어, 가족이되 가족을 넘는 단위까지를 불러내는 단계로 나아간다. 그리고는 「나른한 오후」나 「여름의 끝」을 통해, 산업화가 훼손해버린, 도회로 쫓겨 오기 전의 건강한 삶의 양태를 잠깐 복원하기도 하고 「설날 새벽에」를 통해 민족의 가난한 하루를 오버랩시키기도 한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도보여행」)를 통해 유전되어 내려온 가난의 역사를 추적하던 끝에 그는 「고요한 세계」로 만나는 5·18, 「촘항 속의 개구리」 「하귀리 가는 길」 「영모원에 부쳐」와 같은 4·3의 흔적을 붙들기도 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부활하는 집강소」 「어긔야 어강됴리」에 이르러 동학농민운동의 발발과 좌절이야말로 이 땅 민중, 민족 모순의 기원이자 뿌리라는 점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특히 「촘항 속의 개구리」나 「어긔야 어강됴리」는 4·3의 참상이나 동학운동의 좌절이라는 주제를 그 동네 말로 새롭게 구성하여 보여주는 수작이라는 점에서 주목에 값한다.
- 이명찬(문학평론가・덕성여대 교수) 작품 해설 중에서
갈맷길을 걸으며아미산에 올라 낙동강 하구를 바라본다.
칠백 리 먼 길을 걸어온 신랑을 부드럽게 안는 신부의 일렁이는 치맛자락을 보며,
화동(花童)인 양 햇살이 꽃가루를 뿌린다.
하나가 되어 더 넓고 깊은 세계로 떠나는 부부를 보며
우리는 먼발치서 하객이 되어 서로의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나 갈림길에서 헤어졌다가 돌사다락길에서 또 누군가를 만나는 일을 되풀이하는 동안
강과 강은 바다에서 합일하기 위해 지독한 세월을 견뎌왔고,
저 넓은 여백을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채워 나간다.
땀 흘리며 멀어져 가는 그대여,
힘든 아미산길 끝나 몰운대쯤에서 다시 만나
산길 내내 품었던 철쭉 한 송이 내밀면
가슴 열고 받아주오.
해가 지기 전에.
하귀리 가는 길처서를 지나고도 한참을 떼쓰던 여름 해가 숨비기꽃 흔들림에 발길을 돌렸습니다.
해가 아무리 따가워도 파도가 아무리 짠 내를 몰고 와도
밭담 틈새 무리지은 꽃들이 나의 저항은 꽃을 피우고 씨앗을 품는 것이라며 잔바람에 산들거립니다.
숨비기꽃 속에 한 움큼 씨가 영그는 동안에 숨비소리도 영등할망이 뿌린 씨앗을 품습니다.
천만, 일억, 십억으로도 텅 빈 마음인 사람들은
수백으로 저들의 세상을 이룬 숨비기꽃들을 보며,
시들어가는 꽃망울 속에 여물고 있는 씨앗들을 생각하며,
꺾이며 흩날렸던 세월을 기억하며,
하귀리에 올 때는 숨비기꽃 같은 마음으로 와야 합니다.
거스린물로 가는 걸음 끝에 긴 그림자가 걸립니다.
수평선 너머로 쫓겨 가는 해가 세상을 거스르지 못하는 이의 얼굴을 붉게 붓질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