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 다니자키 문학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두 작품을 엮었다. 간토 대지진 이후, 생활 거점을 간사이 지방(오사카와 교토)으로 옮긴 다니자키는 『치인의 사랑』과 대별되는, 즉 최신의 서구 문명으로부터 길어 오던 문학적 동력을 새로운 영역에서 모색하기 시작한다.
출판사 리뷰
드디어 그리운 마을 인가가 보이기 시작하자 무엇보다 먼저 그의 눈을 끈 것은 여기저기 처마 아래에 널어 둔 종이였다. 여기가 내 선조들의 땅이다. 나는 지금 오랫동안 꿈에서 보던 어머니의 고향 땅을 밟았다. 이 유구한 산간 마을은 원래 어머니가 태어났던 그때에도 지금 눈앞에 있는 그대로 평화로운 경치를 펼쳐 보였을 것이다. 사십 년 전의 태양이나 바로 어제의 태양도 여기에서는 똑같이 뜨고 똑같이 졌으리라. 쓰무라는 ‘옛날’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으로 지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일순간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어딘가 그 주변의 나무 울타리 안에서 어머니가 소녀들 무리에 섞여 놀고 있을지도 몰랐다. -「요시노 구즈」에서
■ 편집자의 말
쏜살 문고 ‘다니자키 준이치로 선집’의 다섯 번째 권은, 다니자키 문학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두 작품을 엮은 『요시노 구즈』다. 간토 대지진(1923) 이후, 생활 거점을 간사이 지방(오사카와 교토)으로 옮긴 다니자키는 『치인의 사랑』과 대별되는, 즉 최신의 서구 문명으로부터 길어 오던 문학적 동력을 새로운 영역에서 모색하기 시작한다. 『여뀌 먹는 벌레(근간)』(1928)부터 점차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일본 고전 문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비로소 「요시노 구즈」와 「장님 이야기」에 이르러 하나의 결실을 이룬다. 앞선 『금빛 죽음』에서 서양의 문학과 미술, 영화를 박물지처럼 열거하던 분위기로부터 급전(急轉)하여, 일본의 고전 문학과 근대 이전의 역사, 전통 예술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주제뿐 아니라 문체 면에서도 일신하여, 아취 가득한 고전 문체를 구사하는가 하면, 간사이 지역의 방언, 문화적 바탕까지 본인의 것으로 소화하여 전혀 색다른 문학 세계를 펼쳐 보인다.
「요시노 구즈」(1931)는 다니자키의 작품 중에서 가장 독특한 형식을 지닌 소설이다. 패권을 둘러싸고 왕통이 갈려 크게 다툰 일본의 남북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집필하고자 친구 쓰무라와 함께 요시노 지역(현재 나라 현 남부)으로 여행을 떠난 화자의 이야기를 일종의 수필 형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화자와 쓰무라가 저마다 마음속에 품은 각기 다른 목적에 따른 경험, 그리고 서로 공통적으로 떠안고 있는 잃어버린 모성에 대한 그리움이 마치 씨실과 날실처럼 정교하게 엮여 「요시노 구즈」의 뼈대를 이룬다. ‘작품을 쓰기 위한 취재’를 다룬 소설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메타픽션(metafiction)’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다니자키 문학의 또 다른 중핵이라 할 수 있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자전적 경험으로 바탕으로) 진지하게 다뤄진다는 점에서 가히 ‘작가 경력의 분수령’이라 할 만하다. 「장님 이야기」(1931)는 저 유명한 일본 전국 시대의 역사적 실화를, 영웅호걸의 시점에게서가 아닌 비천한 장님 안마사의 관점에서 그린 이색적인 역사물이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뿐 아니라, 난세의 절세 미인 오이치와 그 딸들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 금박으로 정교하게 장식한 병풍처럼 찬란하게 조형해 낸다. 앞을 볼 수 없는 장님 화자의 이야기는, 정녕 역설적이게도 더욱 감각적인 방식으로 독자들을 매혹한다. 어떤 의미에서 과거의 역사적 현장을 눈으로는 도저히 목격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대 독자와 「장님 이야기」 속 화자는 동일한 체험을 공유한다. 그 때문에 시각을 잃은 장님 화자의 목소리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과거 전란의 풍파를 한층 생생하게 그려 내는 것은 아닐까? 이와 더불어 노(能)와 샤미센 등, 당시 다니자키가 흠뻑 빠져들었던 일본 전통 문화의 향취 또한 만끽할 수 있다.
내가 야마토(大?)의 요시노(??) 깊은 곳을 유람한 것은 벌써 이십 년 정도 인 1920년대 무렵인데, 지금과 달리 교통이 불편하던 그 시절에 그런 산속 - 요즘 말로 하면 "야마토 알프ㅡ" 지방 같은 데로 무얼 하러 나갈 마음이 들었떤 걸까?
작가 소개
지은이 : 다니자키 준이치로
일본의 소설가. 188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말기부터 쇼와 중기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며 다방면에 걸쳐 문학적 역량을 과시한 작가로, 노벨 문학상 후보에 수차례 지명되는 등 일본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탐미주의적 색채를 드러내며 여성에 대한 에로티시즘, 마조히즘 등을 극도의 아름다운 문체로 탐구하였다. 한평생 작풍이나 제재, 문장, 표현 등을 실험하며 다채로운 변화를 추구하였고, 오늘날 미스터리, 서스펜스의 선구가 되는 작품이나 활극적 역사 소설, 구전.설화 문학에 바탕을 둔 환상 소설, 그로테스크한 블랙 유머, 고전 문학 연구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1965년, 신부전과 심부전으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