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강서일의 시에서 자연 현상은 흐름·밀려옴·떠돎 등의 속성을 지닌 것, 부단히 움직이는 에너지 같은 것이다. 파도는 견고한 대상에 부딪혀 이것을 부수는 에너지 같은 것, 구름은 시인이 이방인의 자의식으로 마주하는, 수시로 변하는 무정형의 형상이다. 그것은 “살았다 죽었다” 하기도 하고, 커피잔에 담아 둘 수도 있다. 이렇게 유동적인 에너지의 집합이 강서일의 시이며, 그 속에는 보이지 않는 시간이 넘실넘실 유동하고 있다.또한 모든 무거움을 해체하는 감각으로 쓴 강서일의 시는 형식부터 간결하다. 내면을 향하여 넓어지는 시인의 정신을 ‘마음’이라 할 때, 그 깊이와 넓이를 우리가 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다. 그의 시는 내면으로의 도피도 회피도 아니며, 무위자연을 지향하는 마음을 겸허히 담아낸다.액체 근대잉여의 손잉여의 불빛,볼 것이 너무 많아 한 편도보지 못하고 밤을 넘긴다.잡을 인형이 너무 많아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처럼수많은 선택지와수없이 구멍 난 파지가 쌓여가는나날들이라니그러나 놀라지 마시라.지금은 천년 빙하가 녹아내리고명사는 동사 되어 흘러가고벽에 걸린 거울은 산산조각파편이 되는 시간늙는다는 것은 과연살아남는다는 것인가(‘신세계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은 희망을 멈출 때뿐’)그러니 놀라지 마시라.미라는 미라일 뿐시간의 밀원지 따라 돌다리도 흘러가고무너질 것은 결국무너지고 마는 것이니,우리의 지붕을 덮치는 액체 시대여!
보이지 않는보이지 않는 시간을 보려고사람들은 시계를 만들었다보이지 않는 바람의 길을 보려고늙은 사냥꾼은 순록의 가슴털을 공중에 뿌렸다사람들은 또 들을 수 없고맡을 수 없는 것을 맛보기 위해숫자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쳤다그러자 어느 날神은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천지를하얀 천으로 덮어버렸다
이사20년 만에 거처를 옮겼다내 몸을 기억하는 가구를 버리고정신을 갉아먹던 글자들을 버리고어머니의 마지막 안방도 고이 두고 왔다그래도 태우지 못한 활자들책장에 던져두고 휘, 한 번 둘러보니새소리는 어디선가 들은 듯했고대리석 기둥은 미련해 보였다쥐똥나무 울타리 옆모과나무는 몇 그루 있었으나사과나무는 없었고벌레 먹은 낙과 한 알 보이지 않았다우주의 벌레 구멍을 찾아먼 곳으로 자리를 옮겼으나기억 저편의 발걸음은 아직도어머니의 묵은 꽃자리에 가 있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강서일
동국대학교 영문학과와 고려대학교 대학원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여주대학 실무영어과 겸임교수를 역임한 바 있다. 역서로는 《래리 킹, 대화의 법칙》, 《당당하게 요구하라》, 《첫 사랑 피카소》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여러 권의 영어 책을 편집, 출간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