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진-정환 소설가의 첫 단편 소설집으로, 2020년 『한국소설』 신인상을 받은 이후, 『월간문학』 『내일을여는작가 』 『문학저널』 『표현』 『한국소설』 등에 발표한 단편들을 엮은 책이다. 『신낙엽군과 킹왕짱』, 우선 제목이 풍기는 인상이 그러하듯 소설 내용도 매우 특이하다. 일반적인 소설 기법으로는 본 적 없는 시도가 작품 곳곳에 드러난다. 「주름 만들기」, 「넌 너의 기억을 믿니」, 「스타를 꿈꾸는」, 「숙제」, 「신낙엽군과 킹왕짱」, 「아이엠」, 「샴 이야기」, 「하루만 더」, 「꿈을 설계합니다」, 「웃음꽃」 등 10편의 단편이 묶였는데, 중첩되는 김 연구원이라는 주인공 외에도, 각각 단편마다 다른 역할로 등장하는 실험동물들, 심지어 우리가 익히 아는 열대어 구피까지 점입가경 인물군이 대활약한다.그들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변화들에 대해 의아해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스며들어 떼어놓을 수 없게 된 끔찍한 기억에 대해, 그것과 함께 하는 진실에 대해, 그 모든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면서도 받아들이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러면서 빛과 그림자를 분리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구분되지 않고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로 현재를 무심히 견디고 있다. 작가가 다루는 다양한 작중 인물들은 한계가 없어 보인다.디는 카메라의 빨간 불이 다시 켜짐과 동시에 ‘토끼 뇌에 주름 만들기’의 최종 목표를 깨우쳤다. 인위 생성된 토끼 주름을 이식받은 인간들이 토끼 흉내를 내기 시작하면 큰일이다. 그래서 주름이 주름인 줄 모르는 토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토끼의 대갈통 한계로 디의 머릿속에서 늘어날 대로 늘어나고 꼬일 대로 꼬인 주름들이 폭발했다. 직전에, 점입가경 문답을 끈기 있게 경청하던 하늘이 안구건조증 앓는 눈에 눈물 모으듯 눈꺼풀을 끔벅했다. 새끼 번개가 일었다. 구름이 번개를 받았고 구름의 물방울들이 재채기 터지듯 급하강하기 시작했다. 바람이 얼씨구나 물방울들을 실어 날랐고, 나뭇잎들이 물방울 간지럼을 타기 시작했고, 이슬 먹은 노오란 풀꽃들은 목디스크 걸린 목을 일으켜 온전히 깨어났다. 동시 디의 대갈통과 가장 가까운 커다란 두 개 귓구멍을 통로 삼아 마구잡이 튀어나온 주름들이 달렸다, 날았다, 튀었다. 혹 주름이 주름인 줄 모르는 애기 토끼가 널 먹더라도 속지 마, 절대로! 하늘과 구름과 나무와 바람이 디의 주름에 동조했다. 나비와 공조한 풀꽃들이 달리고 날고 튀는 디의 주름들을 모아모아 광합성 시켰다. 디의 주름들이 사방팔방 홀씨 되어 흩어졌다. 디를 똑 닮은 애기 토끼들이 새로운 먹이를 먹어 치웠다. 노오란 풀꽃들이 밤이나 낮이나 잊지 않고 흔들리며 앞뒤 좌우 위아래로 디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전달했다. 속지 마, 속지 마, 절대로…. (「주름 만들기」 중에서)
-넌 왜 그렇게 참을성이 없니? 넌 왜 그렇게 자꾸 헉헉대니? 9-12는 나의 더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나는 나의 새로운 목표만을 생각합니다. 김모네는 웃기는 연기로 떴습니다. 나는 표정 연습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벌러덩 하늘을 보고 케이지 바닥에 눕습니다. 3백 개의 실험용 케이지들을 수납하는 대형 책꽂이 형식 스테인리스 선반 바닥은 초대형 하늘이자 초대형 거울입니다. 오늘따라 유난히 반들반들한 하늘은 내 얼굴은 물론 내 더위 먹은 영혼까지 비쳐 줄 태세입니다. 나는 선반을 향해, 헤헤, 호호, 낄낄, 웃고 또 웃어봅니다. 웃음 사이사이 토할 것 같은 증세가 새치기합니다. 부패한 고깃덩어리처럼 뒤죽박죽 곤죽이 되어버린 나의 온갖 장기들이 울렁증 등쌀에 서로 먼저 몸 밖으로 부풀어 터지려고 난리들입니다. 나는 더럭 겁이 납니다. 노 선생이 김모네 유튜브 보기를 속히 중단하고 나타나 나를 울렁증 벼랑에서 끌어내려 주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이 고비를 견뎌내야만 합니다. 나는 선반 거울을 향해 입술을 달싹거립니다. 폭염에 녹아 한 판의 엿처럼 붙어버리려는 주둥이를 강제로 찢어 하하, 킬킬, 호호, 찍찍, 웃음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스타를 꿈꾸는」 중에서)
신낙엽군은 반쯤 감긴 눈으로 목청을 향해 기원했다. 귀신 파도님, 이제 그만 놀려요, 이제 나는 귀신 파도님의 진동을 다 알아요, 귀신 파도님이 당당당 떨면 나는 덜덜덜 떨면서 리듬을 맞추고, 캉캉캉 떨면 갈갈갈 떨면서 리듬 맞추면 된다는 것도 깨달았어요, 힘들었지만 이제는 귀신 파도님 마음도 알 것도 같아요, 나 혼자 단잠 자니까 샘나시는 거죠? 하지만 이제 그만 좀 놀리세요, 나도 잠 좀 편히 자게요, 부디요, 그래서 내일 먹이를 한 알만 더 먹을 수 있다면 귀신 파도님의 당당당 떨림도 조금은 덜 힘들게 견뎌낼 거니까요. 신낙엽군은 잠결에도 열심히 기도했다. 귀신 파도는 분명 마음 넉넉한 신일 테니까. -얏, 떨렝이! 이 등신, 안 일어낫?신낙엽군은 등줄기가 뜯기는 고통에 반토막 난 멸치처럼 터엉 튕겨 일어났다. 갑자기 튕겨 일어나는 바람에 덜덜덜 떨리던 몸이 순간 딱 멈추었다. 신낙엽군은 낭창낭창 흔들리다 벼락 맞은 마지막 낙엽처럼 눈 초점도 제대로 맞출 수가 없었다. 거기 그가 있었다. (「신낙엽군과 킹왕짱」 중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이진
1995년 계간 ‘시인과 사회’ 가을호, 시부 신인상 수상 1998년 동아일보사 발행 월간 ‘신동아’ 34회 논픽션 공모 당선 2000년 SBS서울방송 제2회 TV문학상 수상 2020년 한국소설가협회 ‘한국소설’ 신인상 수상 2006년 소설집 《잘했어! 흰털》 발행. 당그래 출판사2013년 시집 《프라하 일기-우블라젠키 사람들》 발행. 샛강출판사2016년 시집 《지우개도 그림을 그린다》 발행. 샛강출판사2018년 시집 《서랍속의 생》 발행. 샛강출판사현재 월요시 동인지 《시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