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백봉 라용균 선생은 1895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일본 와세다대에 유학 중 2.8 동경유학생 독립선언에 가담, 주동자로 투옥되었으며, 그해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여운형, 김규식과 함께 임시정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해 5월에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 주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자랑하는 영국 런던정치경제대학교(LSE)에서 정치학을 전공하였으며,해방 후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제5대 국회의원 및 보건사회부장관 제6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84년 타계 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서문우리는 좋은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좋은 나라에 살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 조상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상들에게 감사하고, 우리가 누리는 자유, 인권과 풍요, 평화를 우리 후손들에게 온전하게 물려주어 그들도 누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음 세대를 교육하고 있다.우리는 때로 이렇게 좋은 나라의 기틀을 세워 주신 분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았던 독립운동가들은 불굴의 항일 투사들이기는 하지만, 근대의 민주주의 법률과 제도를 깊이 이해하고, 자유와 인권 존중의 문화를 몸에 익히지 못한 분도 많았던 것 같다.대체 이렇게 좋은 나라 대한민국을 만드신 분들은 누구인가? 그래서 우리는 제헌국회의 속기록을 읽고 제헌의원들에 대하여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젊은 시절 독립운동을 하고 중년에 제헌의원을 역임하신 분들 중에서 근대인이, 자유주의와 공화주의를 잘 알고, 어쩌면 지금의 우리보다 국제 질서의 흐름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세계인들이 요소요소에서 활약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중 한 분이 백봉 라용균 선생이다. “아, 바로 이런 분이 있었구나! 이런 분들이 계셔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UN이 「세계인권선언」에서 선포한 새로운 세상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구나! 길고 긴 전쟁에서 목숨 바친 수천만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인류의 이상과 꿈이 바로 여기 동아시아 끝의 대한민국에서 실현될 수 있었구나!”하고 깨닫게 된다.모든 국민이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특히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제헌헌법 제16조(「세계인권선언」 제26조 1항과 같다)를 읽으면서 우리는 감동과 전율을 느낀다. 바로 이 헌법 정신에 따라 우리나라는 건국하면서 초등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해방 당시 78%에 달하던 문맹률을 1950년대 말에 22%로 떨어뜨린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 아닌가?우리가 익히 아는 당시 대한민국의 가난과 어려운 여건을 생각한다면, 혼란 속에서도 멀리 내다보는 혜안, 어둠 속에서도 본말(本末)을 구분하는 깊은 지성을 가진 분들이 바로 제헌의원들이고 대한민국의 건국자들임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는 그중의 한 분, 라용균선생을 공부하였다.일찍이 일본 유학생으로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한 것은 오히려 다른 분들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약관 24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파견·선출된 것은 그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중요한 사람으로 친구와 동지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더 중요한 사실을 말하면, 결과적으로 젊은 시절의 그가 상하이에서 겪게 되는 여러 경험들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는 행운아였다. 사실 임시정부에서도 자금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혁명·독립운동에서 가장 비밀스럽고 실제적인 일이어서 화려한 말만 주고받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밀도 높은 경험이다.그는 의회주의자로서, 자유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민주주의자로서 평생 살게 되는 또 하나의 중대한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1922년, 김규식, 여운형 등 대선배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 참석한 것이다. 사실 많은 청년들이 현실의 공산국가를 가보지 못하기 때문에 막연한 동경도 하고 관념적인 이론에 심취하거나 프로파간다에 속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직접 소련을 경험하고 공산주의의 실상을 보았다.그는 젊은 나이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소련을 직접 가 보는 두 가지 중대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영국 유학을 통해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시작점에서 영국 특유의 경험주의와, 불가지론을 철학적 바탕에 둔 정치철학과 문화를 몸에 익히게 된다.임시정부의 지도자 도산 안창호가 청년 라용균에게 “영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오라.”라고 조언한 뜻 그대로, 해방이 되어 건국을 할 시점에 라용균이야말로 준비된 제헌의원이었다. 바로 이런 분들이 제헌국회 의사당 사이사이에 앉아 중심을 잡아 주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기틀이 제대로 잡힌 것이다.훗날 원로 의원으로서 국회부의장을 할 때는 야당 소속이었으나 한일국교 정상화에 찬성하였는데, 이로써 우리는 라용균의 산업 자본주의 경제 성장과 나라의 발전에 대한 생각이 어디에까지 미치는지,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소신과 정치철학이 과연 얼마나 확고하고 깊은 것인지 알게 되었다. 당시 그의 언행은 우리로 하여금 두고두고 다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그래서 백봉 라용균은 국회의원들에게 주는 ‘백봉 신사상’의 이름으로 남겨두기보다 건국자들 가운데 가장 「세계인권선언」, 즉 당대의 시대정신을 깊이 이해했던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하고, 초기 한국 민주 정의 역사의 중심에 있던, 근대 의회민주주의를 가장 깊이 이해하고 실천한 정치인으로 추념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역사 교육의 최종 목적이 어떤 가공의, 거창한 신화로 치장한 영웅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평범한 부모와 조부모를 존경하고 앞선 세대의 노고에 감사하고, 그 분들의 고민을 이해하는 민주공화국의 성숙한 시민을 기르는 데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후손들에게 말해 주어야 할 것이 있으니, 선각자와 지도자의 중요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위인(偉人)들의 삶과 사상을 연구하였고, 그 결과 그동안 우리가 알았던 분들 가운데는 우뚝하게 높이 선 봉우리 같은 분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 봉우리에 올라 우리가 본 것은 주맥(主脈)이 아닌 지맥(支脈)임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던 중 백봉 라용균의 발자취야말로 바로 우리가 찾던 대한민국사(大韓民國史)의 정맥(正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실로 2·8 독립선언으로부터 반세기가 넘는 오랜 세월을 거쳐 포항제철의 준공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역사의 주된 흐름에 백봉 선생이 발자취를 남기고 또 크게 헌신·기여하셨으니 이런 분을 달리 찾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서 백봉을 연구하고 백봉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대한민국의 탄생과 성장의 과정을 이해하는 올바른 관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백봉 라용균을 공부하면서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했던 지난 2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었다. 김주용 교수, 이상호 박사, 윤왕희 박사, 세 분이 흩어진 자료를 찾아서 좋은 논문과 원고를 쓰느라 수고를 많이 하셨다.시대를 앞서간 사람, 당대에는 외로웠을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쉬운 분, 금방이라도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와 반가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은 동양 신사 백봉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그려 주신 세 분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함께 토론하면서 원고를 검토하고, 퍼즐을 맞추어간 여러분, 백서문 5봉의 후배라 할 정읍의 정치인 유성엽 의원과 시민운동가 최영대 대표, 역사학자 이승렬 교수, 그리고 회의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해 주신 백봉 연구원 사무총장 황인수 박사와 조혜랑 연구원께도 감사를 드린다.2025년 4월『백봉 라용균 연구』 발간위원회 위원장 주대환
백봉 라용균 연구 발간 후기선친에 관한 연구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에 관하여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그 사이 선친의 전기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선친 생시에 여러 차례 자서전 집필을 말씀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특유의 미소로 답하실 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젠가 한 번은 제가 조금 강하게 권유하면서 자술 기록을 남기는 것이 공인으로서 일종의 의무라고 말씀드렸더니 역시 미소와 함께, 그러면 거짓말을 하게 될 것이라고 답하시던 기억이 있습니다. 평소 잘 하시는 조크로, 당신의 자서전을 천지 창조 때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고 하셔서 저도 웃고 말았습니다.세상을 떠나신 후 몇 분이 뜻을 모아 전기 준비를 권유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는 선친 생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망설였습니다. 그러던 차 이번에 뜻이 있는 몇 분이 연구서 준비를 말씀하셔서 저도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말하자면 흔히 있는 전기류 같은 것이 아니라 진지한 학문적인 연구인 것입니다. 주대환, 최영대 두 뜻있는 분들과 이 분야에 관련하여 가장 수준 높은 연구와 저술을 하신 이승렬 박사님이 중심이 되어 작업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실제 연구와 집필을 하신 김주용, 이상호, 윤왕희 세 분 학자도 모두 해당 시기와 주제에 관하여 많은 연구와 업적을 이루신 분들입니다. 연구에 참여한 분들은 대략 3개월에 한 번씩 모여 그사이의 작업과 문제 등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저와 연구원의 황인수, 조혜랑 두 박사님은 작업의 실무를 돕고 간혹 자료 등을 챙겨드리는 일을 맡았습니다.오랜 기간 연구와 토의를 거쳤는데도 최종 원고를 대하면서 참여하신 모든 분들이 아직도 미련이 남는다고 하십니다. 저는 사람이 하는 모든 작업은(어쩌면 신이 하시는 일도) 모두가 미완성이라는 말씀으로 위로도 드렸습니다. 그러나 혹시 이번 연구의 출간으로 우리 민족이 여러 면에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관하여 새로운 관심과 문제 제기 등이 있는 경우 또 다른 작업의 가능성도 열어 둡니다. 그 사이 수고해 주신 주대환 위원장님을 위시하여 작업에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드리며 출간을 맡아 주신 안종만 회장님과 조성호 이사님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2025년 4월라종일
작가 소개
지은이 : 『백봉 라용균 연구』 발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