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나의 삶 나의 인생지나온 길 나아길 길
우리 집안은 누대로 광주에서 터전을 닦아 살아왔다. 나는 탐진 최씨(耽津 崔氏) 집안의 서은공파(西隱公派) 중시조 민상공(黽祥公)의 16세손으로, 1949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우리 형제는 3남 5녀인데, 그중 내가 맏아들이다.
아버지께서는 가업인 약업을 처음에는 나주 중앙동에서 2년여 동안 운영하셨고, 그 시기에 내가 세상에 나왔다. 해방 정국의 끝자락이라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이듬해인 1950년, 내가 두 살이 되기도 전에 우리 가족은 광주로 이거하였다. 곧이어 6·25 한국전쟁이 발발해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고, 외가가 있는 지금의 광주시 남구 효덕동으로 피난했다가 인민군이 물러가자 다시 시내에서 약업을 재개하였다.
아버지께서는 가업을 잇기 위해 약학과에 진학하라고 하셨고, 나는 그 뜻에 따라 조선대학교 약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아버지가 창업한 대성약국을 이어받아 운영하였다. 대성약국 부근에는 당시 광주역이 있어 교통의 요지였는데, 시골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광주에 들어오는 관문이다 보니 언제나 인파가 붐볐다. 자연히 손님도 많아 약국은 성업을 이루었다.
사업을 넓히고자 나는 <대성레저여수온천>과 <대성광산 삼천포 자수정>을 창업해 경영하기도 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모두 접고, 대성약국과 어머니가 일군 화순 사평의 <양산농원>을 돌보고 있다. 이 땅은 35년 전 아버지에게서 매입한 것으로, 120만 평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이다. 아내와 함께 자금을 모아 구입했고, 인근 전답도 매입했다. 당시에는 길조차 없었으나 직접 길을 내어 접근성을 높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셨듯이 산에 편백나무, 측백나무, 밤나무를 심었고, 운산에는 상수리나무가 많아 숯을 생산하기도 했다. 땅이 워낙 넓어 조금만 소홀하면 잡목이 우거져 수익성이 떨어지기에, 늘 인부를 동원해 산림을 가꿔 와 산림자원조성 대통령포장을 수상, 우수독립가 인증서를 전라남도와 화순군으로부터 받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자연 친화적인 삶을 꿈꾸며 임도를 내고 길가에 회화나무 등 다양한 수종을 심었다. 또 인삼을 심어 자연환경 속에서 자라게 했는데, 지금도 산속 곳곳에 숨어 있을 것이다.
공익에도 관심이 많아 여러 봉사단체에서 활동했다. <광주무등청년회의소>와 <광주입석로타리클럽>의 초대 회장을 맡아 지역사회에 봉사했고, 단체 창립 초기의 초석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톨릭 신자로서 <광주대교구 가톨릭실업인회> 회장, <한국가톨릭실업인중앙처> 부회장을 지내며 가톨릭 기업인의 구심점이 되었고, 상호 간 친선을 도모하며 광주 지역 가톨릭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밖에 <광주상공회의소> 의원, <광주광역시 학부모연합회> 회장, <광주시동구약사회> 회장을 역임하며 단체 발전에 힘을 보탰다.
또한 아태 부의장, 유엔 교육자 국제연합회 한국 총재를 지내며 휴전선에 국제 평화도시를 건설하자고 주장, 분단된 민족의 미래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모범납세자 금융우대대상으로 2회에 걸쳐 인정받았다.
문학인으로서는 2003년 《현대문예》 신인상에 당선되어 시인 활동을 시작했으며, 그 인연으로 지금도 운산에 전국 유명 시인들의 작품을 새겨 시비를 세우고 있다.
주마간산식으로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보았다. 그때그때 스쳐 간 내 일생이 눈앞에 선명히 떠오른다.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고, 때로는 희망에 부풀어 젊은 날을 지나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내 나이 일흔일곱이니 일할 날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이른바 <대성산약초농원>이라는 이름 아래, 각종 암 산약초 치유 마을의 꿈을 이루어 몸이 허약하거나 질병이 있는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 주고 싶다. 또한 발효수를 이용해 된장과 고추장을 빚고자 한다. 특히 운산에 심은 약재를 활용해 여성 골다공증, 탈모, 폐경기 연장 등에 도움이 되는 기능성 식품을 만들어 많은 사람에게 이로움을 전하고자 준비하고 있다.
그동안 살아오며 깨달은 것은 부·권력·명예도 좋지만, 누가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신경 쓰기보다 내 양심에 따라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 하느님께서 나를 인정하고 평가해 주시는 삶, 그것이야말로 멋진 인생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라고 기도드린다.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
나는 1949년 1월 22일에 태어났다. 6·25 한국전쟁 직전, 이른바 해방 정국의 어수선한 때였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먹고살기 매우 어려웠다. 아버지는 내가 한 살이던 1950년 1월 1일, 지금의 광주 소방서(구 광주역) 자리에서 대성의약품 도매업을 개업하셨다. 그러나 그해 6월 민족상잔의 비극이 닥치면서, 나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시름과 고초를 겪게 되었다. 풍비박산이 된 약방 문을 닫고 빈털터리가 된 우리 집안은 외가가 있는 광주시 효덕동 노대리(지금의 노대동)로 피난 가야 했다. 나는 너무 어려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온갖 어려운 길을 걸으셨다.
공산 치하 두 달 동안, 공산주의 이념에 반대한 우리 집안은 무사하지 못했다. 가산을 모두 몰수당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마 목숨을 건진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전쟁 와중에 아버지는 고무신 장사를 해 보겠다고 하셨고, 어머니는 부산까지 내려가 고무신을 사 오셨다.
처음에는 16켤레를 팔아 차차 호전되면서 20켤레, 30켤레, 50켤레로 물량을 늘려 갔다.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삶의 의욕을 북돋아 드리기 위해 부산까지 가서 고무신을 사 오신 것이다. 그러나 고무신 장사는 아버지의 본업이 아니어서 곧 약방을 다시 열었다. 부근에 광주향교의 대성전이 있어 ‘大成’의 의미를 따 약방 이름을 지으셨는데, 훗날 대성약국과 대성약품의 이름이 여기에서 연유한다.
아버지는 어떤 사업이든 신용이 제일이라고 믿으셨다. 다만 “먹을 것이 있어야 인심도 생긴다”는 말처럼, 돈이 있어야 신용도 지킬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결제를 잘 받고 또 잘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셨다.
1958년, 약방을 금남로(지금의 대성약국 자리)로 옮기셨다. 약방이 번창하자 1962년에는 광주 광천동에 태인약화학공업주식회사라는 양조·가공식품 공장을 국내 최초로 세우셨다. 당시로서는 낯선 가공식품업이었지만, 김치·마늘·주스류 등을 통조림으로 가공해 생산했고, 「문디카」와 「쎈디카」라는 국산 양주도 시판했다. 그러나 식품 가공업은 당시 우리나라 현실엔 다소 이른 감이 있어, 10여 년 운영 끝에 처분하였다.
그 사이 아버지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근검절약하며 저축한 돈으로 화순 모후산 일부를 매입해 비탈을 개간하고 묘목장을 만들었다. 또 장성 일대의 임야·밭·논도 사들였다.
어머니는 농사를 짓고, 그 부산물로 가축을 기르기 위해 축사를 지어 소와 돼지를 키우셨다. 뿐만 아니라 영광 태청산 일부를 사들여 나무를 심으셨다. 일 년 내내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 전까지 인부들을 격려하고 지시하며 농장과 산림을 관리하셨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버지의 약업을 도왔다.
어머니는 나무를 많이 심고 잘 가꾸셨다. 그동안 심은 나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며칠씩 들에서 지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화순 사평 양산농원에 흙벽돌로 움막을 짓고, 아예 한철을 그곳에서 보내시기도 했다. 전답이 200여 마지기나 되어 쌀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했고, 남는 것은 정부 수매에 내기도 했다.
아버지는 약업을 통해 자금을 모으자, 평소 마음속 깊이 품고 계시던 육영사업을 시작하셨다. 교육만이 헐벗은 가난을 극복하고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한다고 믿으셨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1980년 3월 15일 가족회의에서 학교 설립을 결정하였다. 아직 학교를 지을 만한 여력이 부족했지만, 자식들이 십시일반 보태고 광주 시내 부동산을 정리해 자금을 마련했다. 광주 금당산자락 아래 진월동에 부지를 확보하고 공사를 시작하여, 1981년 3월 9일 마침내 개교했다. 대성여중·고등학교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말처럼, 아버지는 학교를 짓느라 큰 빚을 떠안으셨다. 알다시피 육영사업은 기업처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교육에 대한 신념과 열정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버지의 숭고한 정신이 담긴 이 사업을 통해, 아버지의 삶이 충분히 보상받을 것이라 믿는다. 지금 대성여중·고는 명실상부한 명문 사학으로 성장했으며, 많은 졸업생이 사회 각처에서 우산학원을 빛내고 있다.
어머니께서는 광산군 효지면(지금의 광주시 효덕동)에서 이관(里官) 박국제(朴菊齊)의 2남 3녀 중 막내로, 1924년 10월 20일 태어나셨다. 마을에서 ‘박참봉 댁’으로 불린 외가는 노대리 천석꾼으로 제법 잘사는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천성이 부지런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불의를 보면 불같이 맞서는 야무진 아이였으며, 동네 아이들 가운데 언제나 리더로서 호기가 넘치고 모든 일에 모험심과 적극성이 돋보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열일곱 살이던 해 콜레라에 걸려 토사곽란 끝에, 석 달 남짓한 사이에 모두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께서 자리에 눕자, 어머니는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입에 흘려 넣었지만 허사였다. 석 달 만에 고아가 된 어머니는 이듬해인 1941년 아버지를 만나 혼인하셨다.
가난한 우리 집안에 시집오셔서 온갖 고생을 하셨다. 전쟁 중에는 아버지를 도와 부산까지 오가며 신발을 사 나르기도 하고, 화순 모후산 비탈을 개간하시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묘목장을 만들고 장성 임야의 논밭에서도 추운 날, 더운 날 가리지 않고 들일을 하셨다. 화순 운산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또 아버지께서 학교를 설립하실 때, 어머니는 몇십 년 고생해 마련한 통장과 목장의 소·돼지 같은 가축, 그리고 아끼시던 운암동 2,000여 평을 매각해 학교 설립 자금으로 기꺼이 내놓으셨다. 고생만 하시다가 형편이 좋아지니 우리 곁을 훌쩍 떠나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제 부모님들은 세상을 떠나고 계시지 않지만, 남기신 유업은 자녀들이 이어받아 부끄럼 없이 잘 이끌어 가고 있다. 세월은 유수 같아, 나도 어느덧 77세가 되었다. 오늘까지 풍족히 살아온 것은 부모님의 하늘 같은 사랑과 묵묵한 희생 덕분임을 잊지 않고 늘 감사한다. 앞서 말했듯, 부모님은 6·25 동란 이후 어려운 시절에 피땀 흘려 가족을 먹여 살리셨고, 사회를 위해서도 많은 일을 하셨다. 그 이야기를 주변에서 들을 때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감정을 느낀다. 부모님의 헌신을 곁에서 지켜본 나는, 더욱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부모님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 집안과 가족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께 뜨거운 은혜와 사모의 정을 담아 깊이 감사드릴 뿐이다.
나의 사랑 나의 자녀들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은 자신의 분신이며 또 다른 생명체이다. 나의 부모님이 나를 금쪽같이 여긴 마음을 내가 부모가 되어 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듯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이 세상 만물의 공통점일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새끼를 기르는 동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식을 위해서라면 모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 아이들이 성장하여 제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나는 3녀 1남을 두었는데, 내 손길이 많이 가지 않았지만 아내의 자애로운 보살핌 덕분인지 아이들이 잘 성장해 주어 고맙고도 미안하다. 지금 생각하면, 아이들이 자랄 때 더 많은 추억을 가슴속에 새겨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듯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추억을 통해 부모와 자식, 가족 간의 유대가 친밀해지고 돈독해진다. 그리고 그 추억의 힘으로 어려운 시절을 견뎌 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로서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한 것이 오래도록 마음에 걸린다.
그럼에도 반듯하게 성장하여 우리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 되어 제 몫을 다하는 자식들이 자랑스럽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보고 싶다. 이는 그들에 대한 나의 지극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제 내 아이들이 아들딸을 낳으니 참으로 사랑스럽고 귀엽다. 왜 ‘내리사랑’이라고 하는지 알겠다. 부모님께서 손주들을 얼마나 어여삐 여기셨을지도 짐작할 만하다.
자녀와 손주들과는 함께 살지 않지만 애틋한 마음이 생겨 자주 소통하며, 옛날에 주지 못했던 사랑을 전하고자 한다. 해외여행도 함께하고 가족 행사를 통해 죽는 날까지 부모와 자식, 조부모와 손주의 천륜을 이어 가고자 한다.
3녀 1남 중 맏딸 최혜령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반듯한 마음씨가 고왔다. 성장 과정도 순탄하여 사위 허준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잘 살고 있다. 사위는 이비인후과 의사로 명의를 인정받고 있어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둘째 딸 최성윤 또한 곱게 성장하여 우리 내외의 착한 딸이 되었다. 사위 이상윤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종양내과 의사로, 최근 극동 지역을 담당하며 활약하고 있어 앞으로 더 큰 기대를 갖게 한다. 작은딸은 내조는 물론 아이들 교육도 잘하고 있어 고맙다. 특히 외손자 이상준과 이명섭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막내딸 최성모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딸이다. 사위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아 넓은 식견과 지혜를 갖추었고 예의가 바르다. 시련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성장하여 조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전북대학교병원에서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어 자랑스럽다. 막내딸의 뒷바라지가 좋은 결실을 맺어 참으로 기쁘다.
외아들 최대통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이화여대 의과대학을 나온 재원인 며느리와 함께 병원을 개원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 마음이 든든하다.
자녀들과 사위, 그리고 며느리가 모두 의료계에서 헌신하는 것을 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 집안이 아버지 때부터, 또 내가 약사로 살아온 것이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과 맞닿아 있으니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아프고 병든 사람을 돌보고 생명을 보살피는 일은 너무나 소중하기에, 아이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흐뭇하다.
이렇듯 자녀들이 성장하여 우리 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부모 된 나는 아내와 함께 그들의 삶을 응원하며,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 노심초사 걱정하며 살아간다. 예로부터 “아흔 살 부모가 환갑된 자식을 걱정한다”는 말이 있듯, 자식들은 자신들의 삶만 바라보지만 부모는 자식들의 삶까지도 자신의 인생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