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창비 한국사상선 제8권 『유성룡·이항복·김육·채제공: 유교정치를 구현한 명재상들』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시기 조선의 재상 중에서 공적이 두드러지며 다양한 저술을 남긴 인물들을 다룬다. 선조 때 임진왜란 전황을 통솔하고 전후 처리에서도 큰 역할을 한 유성룡과 이항복, 효종 때 대동법의 실시를 추진한 김육, 그리고 정조를 보좌하며 실학군주로서 치적을 이루도록 도운 채제공, 이렇게 네 사람을 추려내 그들의 글과 말을 엮어냈다.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았다. 조선왕국의 이론적 설계사였던 정도전은 건국 초기 왕실의 세도정치와 신하들의 당쟁을 우려하여 ‘밝은 군주와 어진 신하의 만남’, 즉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 제도에서는 3정승이 6판서 및 여러 관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왕과 논의하는 ‘권력 균형자’의 역할을 맡았다. 창비 한국사상선 제3권 『세종·정조』가 이러한 조선왕국에서 ‘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다루었다면, 제8권은 조선을 대표하는 경세가들의 실천과 사상을 통해 조선이라는 유교왕국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고자 했다.
출판사 리뷰
유교국가의 균형을 이룬 위대한 정승들
사대부 정치의 정점에서 국가경영을 말하다
창비 한국사상선 제8권 『유성룡·이항복·김육·채제공: 유교정치를 구현한 명재상들』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걸친 시기 조선의 재상 중에서 공적이 두드러지며 다양한 저술을 남긴 인물들을 다룬다. 선조 때 임진왜란 전황을 통솔하고 전후 처리에서도 큰 역할을 한 유성룡과 이항복, 효종 때 대동법의 실시를 추진한 김육, 그리고 정조를 보좌하며 실학군주로서 치적을 이루도록 도운 채제공, 이렇게 네 사람을 추려내 그들의 글과 말을 엮어냈다.
정치권력을 둘러싼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끊이지 않았다. 조선왕국의 이론적 설계사였던 정도전은 건국 초기 왕실의 세도정치와 신하들의 당쟁을 우려하여 ‘밝은 군주와 어진 신하의 만남’, 즉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 제도에서는 3정승이 6판서 및 여러 관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왕과 논의하는 ‘권력 균형자’의 역할을 맡았다. 창비 한국사상선 제3권 『세종·정조』가 이러한 조선왕국에서 ‘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다루었다면, 제8권은 조선을 대표하는 경세가들의 실천과 사상을 통해 조선이라는 유교왕국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길라잡이가 되고자 했다.
국난에 맞서 빛을 발한 재상 정치의 주역들
서애 유성룡(1542~1607)은 경북 안동 출생으로 21세 때에 퇴계 이황을 찾아가 제자가 되고 2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유성룡이 선조를 호종하면서 보여준 분별력과 외교력은 단순히 조선이라는 왕조를 수호한 데 머물지 않고 나라 전체를 환란의 위기에서 벗어나게끔 한 것이었다. 유성룡 편의 2장에 정선하여 수록된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전모를 세세하고 정확히 담아낸 국가적 기록으로 큰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이 소개하는 네 명의 재상 모두 국가 재상이기 전에 선비였지만, 유성룡이야말로 유학-주자학에 매진한 학자였다. 유성룡은 당시 신진학자들이 양명학을 공부하며 주자학을 비판하는 분위기에서, “행(行)을 중요시하면서도 지(知)를 더욱 귀하게 여긴다”(52면)라며 이를 절묘히 수렴하는 자신만의 학문방법론을 제안한다. 다시 말해 유성룡에게 양명학은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가 지나치게” 된 것으로, 그는 양명학의 문제의식을 수긍하면서도 지(知)의 측면을 좀더 강조하는 참된 지, 즉 진지(眞知)를 더 높은 가치로 상정했다. 이같이 더 높은 지향점에 대한 끝없는 탐구는 유성룡의 삶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이는 임진왜란 당시 그가 보여준 사명감과 책임감, 그리고 면밀하고 구체적인 기록의 정신으로 발현되었다.
『징비록』 속 몇몇 장면들은 유성룡의 진가를 보여주는데, 그중에서도 선조와 명의 사천사 간의 회담에서 선조의 폐위가 언급되자 유성룡이 나서서 명의 장수와 담판을 지으며 조선의 입장을 강하게 피력해 선조 폐위 논의를 되돌린 장면은 이 책의 백미다. 당시 조공체제하에서 약소국 재상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지혜를 선보인 것이다. 그밖에도 임진왜란 주요 요충지 전투에서 유성룡이 보여준 여러 지략들은 그가 말한 진지(眞知)가 어떻게 현실에서 구현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유성룡을 한 사람의 명재상일 뿐 아니라 주체적이고 지적인 리더십을 갖춘 사상가로 볼 수 있는 근거다.
이항복(1556~1618)은 유성룡보다 14세 연하로, 임진왜란 당시 도승지로서 선조의 피란길을 함께했고, 전쟁 내내 유성룡을 적극 옹호하고 협조하면서 전쟁 종식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경북 안동 출신의 유성룡과 달리 서울 명문 출신에 학술적 배경도 달랐던 이항복은 당파적으로는 서인에 속했지만 학통의 차이에 연연하지 않았다. 율곡학파에 속해 있으면서도 퇴계 이황의 학술적 업적을 크게 샀던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재난 앞에서 개인사를 제쳐두고 결연히 국사를 우선시했고, 사대부들이 노동을 경시하는 풍토를 안타까워했다. “내가 걸어온 실상을 조용히 살펴보니 문(文)도 아니고 무(武)도 아니고, 농업도 상업도 하지 않았으니, 공연히 천지 사이에 한낱 커다란 좀벌레에 지나지 않을 따름”(168면)이라는 이항복의 자기성찰은 현재에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나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세의 대가들
김육(1580~1658)은 인조 대부터 효종 대까지 활동한 명재상으로, 광해군 집권기에 북인정권에 맞서다가 낙향해 십여년간 두문불출한 뒤 인조반정 이후 왕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입성했다. 그때 김육의 나이가 44세였고, 그 뒤 줄곧 중앙 정치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7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쟁 후의 복구와 민생 회복에 매진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대동법이다.
대동법이란 17세기 당시 백성들에게 부과되었던 부역의 부조리함과 과중함을 덜고자 세금을 토지 기준으로 통합하는 법령이다. 이 방식이 관철되면 부역을 지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유리하고 토지를 소유한 양반계층에게는 불리했다. 이에 지배층의 반발이 거셌지만 백성들은 “논밭과 마을에서 춤을 추며 개들이 아전을 보고도 짖지 않”(267면)았을 정도로 환영했다. 여러 부실한 면이 있긴 했지만, 대동법은 당시로선 무척 획기적인 정책이었다. 이처럼 김육이 대동법을 평생의 숙제로 삼게 되었던 사상적 근거는 ‘편민익국(便民益國)’이었다. 이는 김육이 산골에서 숨어 지내며 농사를 지을 때부터 품어왔던 뜻으로, 실용과 공리의 정신으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그의 뚝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책에서는 김육의 대동법 관련 논설을 비롯하여, 명청 교체기에 바닷길로 명나라 사행을 떠나며 남긴 기록 「중국사행기:『조경일록』」, 그의 생활 주변을 묘사한 산문 「구루정기」, 그리고 화폐의 주조와 통용에 관한 글 등을 소개한다.
채제공(1720~99)은 18세기 영정조 집권기의 재상으로, 영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당파적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에 영조의 손자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순간부터 그를 바로 곁에서 보좌했다. 정조가 채제공을 불러 직접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선대왕(영조)께서 일찍이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나와 너희 부자 사이를 두루 온전히 하려고 노력한 것은 채 아무(채제공)다. 참으로 나에게 있어서는 진실한 신하요 너에게 있어서는 충신이다’라고 하시었다.”(278면)
실학군주 정조의 충신답게 채제공은 주자학에 정통하면서도 백성의 구체적인 생활상에도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황―정구―허목―이익’이라는 조선 유학의 계보를 마음에 둔 채로, 다른 한편 무명의 하층민들의 삶을 기록한 산문들을 남겼다. 채제공의 이 같은 실학자의 면모는 ‘경국제민(經國濟民)’으로 집약되어 그가 펼친 여러 정책들에 가미되었다. 서울에서 독점적 상행위를 단속한 ‘신해통공’과 신도시 화성 건설 계획이 대표적 사례다. 이 개혁 조치가 실행된다면 “주민은 자연히 살아가는 것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생길 터이고, 다른 지방의 사람들도 반드시 불러들이지 않아도 필시 제 발로 찾아오게 될 것”(328면)이라는 전망은 새로운 시대를 꿈꿨던 개혁군주와 신진사대부들의 열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왕도정치를 현실화하고자 한 정치가이자 사상가, 그들의 삶과 꿈
조선은 유학을 숭상한 왕조국가로서, 유성룡·이항복·김육·채제공은 어려서부터 유학 공부에 충실하고 자신이 배운 민본 사상을 평생의 과제로 삼아 현실 정치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교를 위시한 절대왕정이라는 체제의 한계는 그들의 실천에도 영향을 미쳐, 김육의 대동법이나 채제공의 신해통공은 근본적 개혁조치라기보다 당시 체제를 보수·유지하는 차원에 그치고 말았다. 그럼에도 이 네 명의 명재상들은 당대의 여러 위기에 맞서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이 남달랐고, 그리하여 각 상황에 맞는 전략적 사고를 펼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21세기의 우리가 조선조 명재상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바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나 개벽사상 등 한국사상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유성룡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다.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전적, 공조좌랑 등을 거쳤으며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壯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부제학, 대사간, 우부승지, 도승지를 거쳤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려놓으려 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590년 우의정에 올라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녹훈되고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후 왜란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과 정읍 현감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의주 목사와 전라도 좌수사에 천거하였으며,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주장했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軍務)를 총괄했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선조를 모시며 평양으로 파천했다. 이때 나라를 그르쳤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이유로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는데,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다. 이여송이 벽제관(碧蹄館)에서 패배하고 퇴각하려 하자 이를 만류했으며 일본과 화의에도 반대했다. 유성룡은 전란 기간 내내 군대 양성과 더불어 훈련도감 설치, 화포를 비롯한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 확충에 노력했으며,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지은이 : 채제공
1720년(숙종46)~1799년(정조23). 조선 후기 문신.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743년 문과 정시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11월 영조의 특명으로 시행한 한림소시(翰林召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여 예문관 사관이 되었고, 이후 대사간, 한성 판윤, 병조 판서, 예조 판서, 호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780년 역적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 주장으로 공격을 받자 사직하고, 명덕산(明德山)과 노량(鷺梁) 등지에서 은거하였다. 1788년 우의정이 되었으며 2년 후 좌의정으로 승진하면서 3년간 혼자 정승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였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金縢)〉을 정조와 함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채택될 만큼 두 국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며,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사후인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신원되었다. 문장은 소차(疏箚)에 능했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李敏求)․허목(許穆), 아래로는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문집으로 《번암집》이 있다.
지은이 : 김육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여러 중앙 관직을 거쳤다. 대동법의 전국적 확대 시행과 화폐 유통, 수레 보급 등 현실적 개혁을 추진해 민생 안정에 기여했다. 저작으로 『구황촬요』 『종덕신편』 『유원총보』 『해동명신록』 등이 전한다.
지은이 : 이항복
조선의 정치가로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고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는 등 난국 극복에 기여했다.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다 유배되어 생을 마쳤다. 저작으로 『사례훈몽』 『주소계의』 『노사영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