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나의 외면과 내면을 탐색하는 여정
사진 한 장 앞에서 절로 감탄할 때가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나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이 담긴 사진 앞에서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관해서 집요하게 파고드는 장면을 만날 때 더욱 그렇다. 가령, 나의 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여러 다양한 변화와 노화 과정을 가감 없이 담는 셀프 포트레이트를 볼 때 그렇고, 자신의 정체성이나 증상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살피기 위해 과거의 시간과 가족사를 파헤치는 작업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행위와 여정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창작이란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대면하는 ‘에고 트립(Ego-Trip)’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번 호에서는 집요하고 철저하게, 또 꼼꼼하고 면밀하게 나의 외면과 내면을 탐색하는 사진들을 만나본다. 그리고 김사월, 하미나, 정지음, 하은빈, 김신식 등의 필자가 쓴 에세이를 통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과정의 의미를 되새긴다.
출판사 리뷰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새벽 2시부터 4시까지, 공포탄을 소지한 채 부대 정문에서 경계 근무를 섰다. 솔직히 말하면, 경계도 근무도 아니었다. 그저 2시간 동안 서 있다가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 야심한 시간에 외진 부대 앞을 지나가는 차도, 행인도 없었다. 북한군이 굳이 최전방도 아닌 우리 부대를 골라 침입할 리 만무했다. 사실상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었다. 그랬기에 그 2시간의 새벽 경계 근무는 내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길고 지루한 일이었다. 라디오를 숨겨 몰래 듣거나 나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사소한 맨손체조를 반복하거나, 달과 별을 멍하니 쳐다보거나…. 그 무엇을 해도 시간은 슬로 모션처럼 느-리-게- 흘러갔다. 그렇게까지 느리고 더딘 시간은 처음이었다.
그 새벽에는 시간만 평소대로 흘러간다면 영혼도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수많은 시도를 거쳐 가장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는 방법을 찾고야 말았다.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일이었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수많은 장면과 순간들이 앞다퉈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 없는, 나만 알 수 있는 수치심과 죄책감, 자괴감과 좌절감, 어긋남과 후회, 미련과 체념…. 하나씩, 하나씩 주워서 살펴보기 시작하면 내 안의 기억과 이미지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렇게 더 높이, 더 멀리, 더 오래 과거의 바다로 자맥질해 점점 더 어린 시절로 회귀하면, 결국 최초의 기억까지 마주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내가 간직한 나의 이미지만 대면하는 새벽 2시부터 4시까지의 시공간에서는 나와 연결된 것이라면 그 무엇이든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이외의 모든 현실은 멀끔하게 표백되었다.
가끔 그 새벽의 진공 상태에 가까웠던 시공간을 다시 마주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는 그렇게까지 세상만사를 뒤로 물리고, 나에 대한 기억과 이미지만 쫓을 수는 없기에. 대신에 어떤 사진 작업들을 바라보면서 그 진공 상태에 간접적으로 접속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자신에게 향한 시선들, 카메라를 들고 날카롭게 나를 파고드는 사진들을
마주할 때 그런 순간이 다가온다. 가령, 나의 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여러 다양한 변화와 노화 과정을 가감 없이 담는 셀프 포트레이트를 볼 때 그렇고, 자신의 정체성이나 증상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살피기 위해 과거의 시간과 가족사를 파헤치는 작업을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행위와 여정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시도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창작이란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대면하는 진공 상태로 향하는 ‘에고 트립’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번 호에서는 집요하고 철저하게, 또 꼼꼼하고 면밀하게 나의 외면과 내면을 탐색하는 사진과 글을 만나본다.

〈잠들어 있는 학생, 연도 미상〉은 당시 작가의 미숙한 사회성에서 비롯된 수치심을 은유한 작품으로, 자신의 형태를 헝겊 인형의 물성으로 대체하며 우리에게 존재감에 대한 물음을 던집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야”라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박수를 받는 이야기는 성인이 되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예술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저는 지금까지 TV장 뒤에 숨어 있게 되었습니다. 내 작품이 발견되기를 기다리면서요. 누군가 만져보고 웃고 울어준다면 머쓱한 척 밖으로 걸어나가려고 했는데, 왜 이리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 같을까요. 그 사이에 친구들은 저에게 흥미를 잃고 새로운 재미있는 걸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조급해하지 말아야 할까요, 이제라도 포기하고 슬그머니 나와야 할까요. 제발 누군가 말해주시겠어요? “야... 일어나....”
- 김사월, <잠들어 있는 학생, 연도 미상> 중에서
사람에게 질려 오래오래 혼자 시간을 보내보니 사람이 그리운 때도 드디어 찾아왔다. 완벽하게 고립된 공간. 충분히 시간을 보내고 나자 이제 내게 그곳은 지옥보다 더한 무(void)의 세계로 느껴졌다. 나를 비추는 타인 없이는 어떻게 내가 세계에 존재 한다는 걸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를 질리게 하는 존재든, 나를 화나게 하는 존재든, 내가 동경하는 존재든, 실은 나를 돕고 싶은 거면서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존재든, 그 모든 살아 있는 존재가 없다면 나는 내가 누구인지 영원히 알 수가 없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이 있다. 이젠 이렇게 생각한다. 타인을 지옥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참 다행이다. 이렇게 바꿔 써 본다. 나는 지옥이다. 내 지옥을 내가 감당할 수 있도록 버텨본다. 모두 각자의 지옥에서 건투를 빈다.
- 하미나, <나는 지옥이다> 중에서
목차
특집 | 에고 트립 : 나에게 가까이
001 See-through, Transparence _ Sidonie Ronfard
022 무모연작 _ 이예은
036 Through Hardship to the Stars _ Ornella Mari
050 Two Ways to Carry a Cauliflower _ Emma Sarpaniemi
066 잠들어 있는 학생, 연도미상 _ 김사월
070 나는 지옥이다 _ 하미나
076 지워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_ 정지음
084 ‘너-나-들-이’ 여행자들에게 부치는 편지 _ 하은빈
090 포스기에서 _ 김신식
098 Weapon of Choice _ Minami Ivory
112 Self Reflection _ Kristina Varaksina
124 Villa Argentina _ Aruna Canevascini
136 Frida Forever _ Frida Lisa Carstensen Jersø
162 Invisible-You _ Enikő Hodosy
164 Perceptual Isolation _ Kat Bawden
178 [연재_영화의 장소들] 정치적인 것의 장소, 다시 _ 유운성
185 [연재_일시 정지] 사진엽서와 역사의 비늘 _ 서동진
192 [에디터스 레터] 망한 전시 _ 박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