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정하고 또렷한 시선으로 삶 곳곳에 어룽진 상흔을 응시하는 시인 이기성의 첫 산문집 『놀이터의 유령』이 문학과지성사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의 열한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시집 여섯 권과 평론집 두 권을 펴내며 꾸준히 독자와 소통해온 문학인으로서 열어 보이는 글쓰기에 대한 고백, 도시 풍경마다 스며 있는 고독과 소외, 금지되고 난파된 언어를 둘러싼 단상 등을 폭넓게 다룬 산문 20편을 묶었다.『놀이터의 유령』에는 장르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문장들이 선연하게 얼크러져 있다. 시와 산문의 구분은 모호해지고 픽션적 구성과 비평적 사유는 자유로이 연결된다. 어떤 사건의 장면을 날카롭게 짚어내는 리포트 같기도, 자신의 우연한 수신인이 되어줄 상대를 찾아다니는 아주 내밀한 편지 같기도 한 이기성의 글 속에서 다층적인 문학의 언어가 태어나고, 이는 현실의 언어와 끊임없이 맞물린다. 마음껏 몽상하는 창조와 힘차게 뛰어노는 역동이 파괴된 폐허에 끝까지 남아 있을 최후의 놀이기구가 있다면, 언어를 축으로 하여 문학과 현실을 잠시간 넘나드는 시소가 아닐까.나는 K가 시인인 것을 안다. 그는 오랫동안 남몰래 시를 썼고, 그의 시가 씌어진 공책은 책상 서랍 맨 아래 칸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직장에서나 집에서나 K는 밤낮으로 시를 생각하고 그것을 옮겨 적는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읽을 수 있는 시. 말하자면 나는 그의 유일한 독자인 것이다. 선의에 가득한 독자로서 나는 그의 시를 사랑한다.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향기롭고 부드러운 맛을 가지고 있다. 딱 한 번 앞니가 부러질 뻔한 적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크리스마스 쿠키를 먹듯이 나는 그것을 조금씩 갉아 먹는다. 밤새도록 사각사각…… 검은 글자가 사라진 공책은 처음의 백지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K는 무한히 쓸 수 있고 나의 배고픔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K와 나는 쓰기-지우기라는 공동의 작업을 수행하는 멋진 한 쌍이 아닌가. (「연인」)
—저녁엔 축제가 있었답니다. 모두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죠. 누구나 달콤한 사탕처럼 빨아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추억이 하나쯤은 있는 법이죠. 향기로운 술과 화려한 웃음이 거품처럼 넘치는 시간 말이에요. 그런 날엔 사람들은 우리 속에 있는 코끼리를 잊어버리죠. 그러나 축제는 끝이 나고 음악은 꺼지고 이제 텅 빈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어둠으로 가득한 현관에 서서 오랫동안 가방 속의 열쇠를 뒤적거리죠. 그들은 알지 못해요. 망설임 끝에 현관문을 열었을 때,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는 잿빛 코끼리를 보게 되리라는 걸. (「나의 동물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봄이 다가와 있어. 너는 숨을 죽이고 꽃이 피는 것을 기다려. 하지만 천변의 나무들은 아직 고집스럽게 웅크리고만 있어. 회색 하늘 아래서 자신의 비밀을 절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듯이.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이 확신에 찬 몸짓으로 겨울의 외투를 확 벗어 던지는 순간이 반드시 올 거야. 세상의 모든 비밀이 왈칵, 피어오르는 순간, 지상의 모든 빛깔들이 일시에 난만하게 터져 나오는 그 순간이. 그리고 그때 우리는 무엇을 말하게 될까, 밤의 새하얀 입술로. (「검은 식당에서」)
작가 소개
지은이 : 이기성
1998년 『문학과사회』에 「지하도 입구에서」 외 3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채식주의자의 식탁』 『사라진 재의 아이』 『동물의 자서전』 『감자의 멜랑콜리』, 평론집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 『백지 위의 손』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형평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