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복간reissue, 반복repetition, 부활resurrection을 함축하는 문학과지성 시인선 R의 스무번째 시집은 황지우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이다. 1985년 출간된 뒤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시집이 40년이라는 아득한 시간을 가로질러 다시 우리 곁에 찾아온다.황지우의 시는 전통적 서정시와는 전혀 다른 형태와 세계관으로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을 경험하며 우리는 또 다른 시의 지형을 디뎌볼 수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 분단, 군사독재와 같은 당대 중요한 상황이 이 시집에서 콜라주, 몽타주, 일상 기록 재배치 등의 실험적 기법들로 아카이빙돼 출현한다.그 새는 자기 몸을 쳐서 건너간다.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는 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연안으로 가고 있다.―「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전문
나무는 자기 몸으로나무이다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영하 20도 지상에온몸을 뿌리 박고 대가리 쳐들고무방비의 나목(裸木)으로 서서두 손 올리고 벌 받는 자세로 서서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온몸이 으스러지도록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아아, 마침내, 끝끝내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꽃 피는 나무이다―「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전문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자기가 앉은 가지에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새는자기가 앉은 자리에자기의 투영이 없다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과거가 없는 탓일까새는 냄새나는자기의 채취도 없다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어리 하나로그러나 막강한 풍속으로 거슬러 갈 줄 안다생후의 거센 바람 속으로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 본다―「출가하는 새」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황지우
195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1980년 5·18민주화운동 가담으로 구속되면서 제작당했다. 이후 서강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수료했다.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연혁(沿革)」이 입선한 뒤 「대답 없는 날들을 위하여」 등을 『문학과지성』에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한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거쳐 1997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는 너다』 『게 눈 속의 연꽃』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와 시선집 『성(聖)가족』 『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시극집 『오월의 신부』, 산문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등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 백석문학상을 수상하고 옥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