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간절함이 닿은 언어의 자리
― 정원선 시집 『천천히 거짓말이 자랄 수 있도록』
199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2019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한 광주 토박이 정원선 시인이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후 29년 동안 벼리고 벼린 시편들을 모아 첫 시집 『천천히 거짓말이 자랄 수 있도록』(달아실 刊)을 펴냈다. 달아실시선 92번으로 나왔다.
등단 이후 거의 삼십 년이 다 되어서야 시집 한 권을 묶은 것이니만큼 <시인의 말>도 남다를 법한데, 의외로 덤덤하다. 물론 정원선 시인의 진솔함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번 첫 시집을 내면서 두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첫째는, 아내가 원하는 제목을 시집 제목으로 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시집을 응모했을 때 맨 먼저 연락이 오는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위 두 가지 원칙을 다 포용한 시집이기에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습니다.
노골적인 말을 노골적이지 않게 하려고 시를 써왔습니다. 멋진 문장은 멋진 추억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사실 저에게 시보다 소중한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입니다. 할머니 故 정귀례, 엄마 정종순, 장모님 故 최송자, 아내 김경희, 두 딸 정지민, 정채은에게 이 첫 시집을 바칩니다.”
시집의 해설을 쓴 임지훈 문학평론가는 이번 시집을 “간절함이 닿은 언어의 자리”라고 명명하면서 이렇게 평한다.
“정원선의 시집 『천천히 거짓말이 자랄 수 있도록』에서 시적 화자의 언술은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진행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의 시적 화자는 때로 현실과 환상 양자에 한 발씩을 디디고 선 사람처럼 말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에서 까치발을 들어 환상의 세계를 향해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때 현실과 환상을 나누는 이분법적 기준이 결코 참과 거짓, 진실과 허구와 같은 대립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에게 있어 현실이란 감각을 통해 체험되는 리얼리티를 의미하고, 환상이란 그러한 리얼리티로부터 발명되는 또 다른 현실이라 말하는 편이 제법 적확하지 않을까 싶다.”
“그가 제시하는 언어적 환상이란 현실의 여러 제약과 결핍으로부터 배태된 간절함의 결정체라 할 수 있으리라. 때문에 그의 시는 많은 경우 현실에서 자신의 감각을 통해 인지된 대상에 대한 서술에서 시작하여 그 대상을 통해 들여다본 자신의 슬픔을 꺼내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이렇게 꺼내어진 슬픔은 그의 언어를 통해 말끔히 씻겨 간절함을 담은 새로운 이미지로 태어난다. 이처럼 현실의 슬픔과 간절함을 담은 환상을 오가는 언어가 바로 정원선의 시집 『천천히 거짓말이 자랄 수 있도록』의 특징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우리가 그의 시를 오롯이 읽기 위해서는 그가 가진 슬픔의 현실에서부터 세심히 그 언어를 더듬어나가야 함을 의미한다.”
“정원선의 시적 방법론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사랑’도,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 시공간도, 실체로서만이 아니라 가망으로써도 존재한다. 부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기묘한 인식론적 반전,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정원선이라는 시인이 각박한 현실에 바치고자 하는 유일하게 실체적인 문장인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그 말은 그 자체로서 곧바로 취해질 수는 없기에 그는 현실로부터 추인된 환상의 언어를 통해 기묘한 시적 여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의 앞날에 기록될 모든 실패들에 헌사를 보내며, 그로부터 취해질 시적 성취에 축복을 바라본다.”
정원선의 시를 하나로 정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그의 시가 그려내는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고, 그의 시가 그려내는 변주가 그만큼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원선의 개성이 담긴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향후 그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또 한 명의 개성 있는 시인의 출현이 반갑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정원선
광주에서 태어났다. 199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와 2019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했다. 2025년 광주문화재단 지역문화 예술육성지원 사업 선정.
목차
시인의 말
1부. 우연이 쌓이면 유연해질 거야
까마귀 선언문│10만 개의 점│동굴│눈먼 시계공을 위한 바람의 내레이션│마네킹협주곡│어항 ― 희귀병│천천히 거짓말이 자랄 수 있도록│피뢰침│피뢰침에서 아침을│호시탐탐│정수기 놀이│달빛 포스터│샌드위치맨│먼나무│매달릴 수 없는 나무에서 태어난 방울토마토
2부. 당신이 그려준 동굴 속을 울면서 걸어간다
나비의 묘비명│회전문 중독자│질문의 서書│꿈꾸는 식물│물끄러미, 사랑│속의 미로│우:산│한눈에 내려다보이는│삽│고양이가 추구했던 실패 분류법│Cup & Cup’s│달력 속에서│아령들│시 일기 ― 젖무덤│재스민 블루스
3부. 먼 감정의 나라에서 온 스파이
바람의 피는 어디론가 흘러가는 중이다│영원과 하루 ― 장승포│달콤 쌉싸름한 야구 경기│말 나비│물의 영혼│호랑나비전傳│폐가 느와르│노을을 낭독하다│옥탑방 엘레지│먼 감정의 나라에서 온 스파이│비행운│주사위│컵 속에서 일어난 두 가지 사건과 한 번의 섬광│스테인드글라스│연못의 노래
4부. 착각은 언제나 찰,칵하고 마음의 문을 연다
이슬의 시간│귀뚜리│눈물 한두 방울이 섞인 실험 시│늪│밤이 뱀처럼 하도 울어서│가령, 흰 바람벽이 있어│나만의 북극곰과 조용히 늙어가고 싶어요│풍선 공동체│식은땀 일기│모래알│전위적인 꿈│우아한 세계│변방으로 회귀│불어난 계곡물 소리에│기린에서 보낸 한철│환각의 샘
해설 _ 간절함이 닿은 언어의 자리 ․ 임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