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2015년 계간 ≪부산시단≫으로 등단한 노병희 시인의 첫 시집 <그래서 흑백>이 애지시선 시리즈 127번째로 나왔다. 노병희 시인은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며 제2회 ‘부산 어묵 사진’ 공모전 대상, 제12회 ‘건설근로자 사진’ 공모전 대상 등 다수 수상했고, 2019년 고성 디카시 공모전에도 입상한 심미안을 첫 시집에 고스란히 녹여낸다.시인은 존재적 고뇌, 가족, 아버지와 누나, 이웃, 노동자, 인연이 없지만 외면할 수 없는 타자의 삶에 시선을 주고 언어로 발화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평범하지 않은 깊이를 찾기까지 절제된 감정으로 기억을 불러내거나 응축하고 비운 목소리로 누군가를 호명하는 시선은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여운이 짙다. 해설을 쓴 최은묵 시인은 “노병희 시의 장점은 애써 말하지 않고 힘을 주지 않고 말을 덜어내고 참음으로 울림의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출판사 리뷰
2015년 계간 ≪부산시단≫으로 등단한 노병희 시인의 첫 시집 그래서 흑백이 애지시선 시리즈 127번째로 나왔다.
노병희 시인은 사진작가로도 활동하며 제2회 ‘부산 어묵 사진’ 공모전 대상, 제12회 ‘건설근로자 사진’ 공모전 대상 등 다수 수상했고, 2019년 고성 디카시 공모전에도 입상한 심미안을 첫 시집에 고스란히 녹여낸다.
시인은 존재적 고뇌, 가족, 아버지와 누나, 이웃, 노동자, 인연이 없지만 외면할 수 없는 타자의 삶에 시선을 주고 언어로 발화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평범하지 않은 깊이를 찾기까지 절제된 감정으로 기억을 불러내거나 응축하고 비운 목소리로 누군가를 호명하는 시선은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여운이 짙다. 해설을 쓴 최은묵 시인은 “노병희 시의 장점은 애써 말하지 않고 힘을 주지 않고 말을 덜어내고 참음으로 울림의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가령, 시 섬진강 누나에서는 “백양산 자락 강물에 산그림자 눕고//그 강물에 고무신 흘린 누나는 맨발로 눕고//누나 손 잡고 강변을 걷던 어린 날은 눕지 못하고” 라는 전문에서 보여지듯 산그림자 누운 곳에 맨발로 누운 누나와 그 기억을 무심히 강물로 흘려보낼 수 없는 화자의 내면을 담담하게 응축함으로써 오히려 넓고 깊은 이미지를 그려낸다.
시 모난 돌에서는 등 굽은 아버지, “먼저 가신 아버지”를 소환하며 둥글어진다는 건 “닳는다는” 것이고, “닳는다는 건 몇 겹 껍질을 벗어내는 일”임을 통찰하는 시선이 간결하고 담백하다.
한편 ND400는 노인병원 의사의 사진을 통해 “살아온 이야기 하고 또 하고, 지치지도 않는 무용담을” 늘어놓는 노인들의 삶을 담아낸다. 또한 “소독약 냄새가 살아온 모든 색을 지워버린” 흑백의 느낌을 빛을 줄여서 시간을 확보하려는 ND 필터 이미지로 변주한다. 최은묵 시인은 표제작이기도 한 이 시의 해설에서 “다 비운 것도 아니고, 끝점도 아닌, “쉼과 멈춤 사이에 어울리”는 흑백은 오래전 기억으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노병희 시인 주변을 맴돌던 화두였음이 틀림없다.”고 진단한다.
시인이 겨울이나 그림자처럼 채도를 잃은 삶의 바탕에 깊이 마음을 둔 까닭은 축적된 관찰과 오랜 고민의 흔적이다. 죽음을 소환하여 새로운 숨을 불어넣고, 겨울 이미지를 통해 봄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철길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시 겨울을 견디는 이유에서 시인이 꿈꾸는 시세계가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채우는 봄의 세상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이번 시집은 타자를 품고 어울리며 발화되는 언어로 온기를 채우는 서정이 두드러진다. 누나로부터 아버지로, 비정규직 김 씨로부터 2022년 10월의 이태원에 이르기까지 개인에서 사회로 확장하며 세상의 그늘지고 아픈 곳을 따듯하게 바라보고 어루만지는 시세계가 오롯이 담겨 있다. 종교적 시선도 일상의 삶과 궤도를 같이하고 있다.
그 과정이 곧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지켜주고 싶은 것들”을 향한 깊은 응시와 기도임을 낮고 고요한 서정으로 들려준다. 그래서 “쓰려던 말들이 번진 잉크처럼 멀어져도 펜을 쥔 손은 따듯했으면”(지금 여기부터) 바라고 있는 시인의 시세계는 맑은 풍경소리 같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치켜든 어린아이의 손
파지를 잔뜩 싣고 가는 할머니의 수레
도로에서 비질하는 청소부의 새벽
지친 몸으로 마지막 열차를 기다리는 걸음
길에서 신발 끈을 다시 묶는 노인의 더딘 몸짓
밤늦은 골목길 자식을 기다리는 엄마의 조바심
보도블록 틈을 비집고 나온 민들레 한 포기
철길 한가운데 홀로 핀 백합의 어리둥절
거미줄 이슬에 맺힌 고향 집 냄새
첫차를 향해 뛰어가는 평범한 사람들
그 속에 나도 있고
비어 있는 곳을 함께 채우고 있고
- 「지켜주고 싶은 것들」 전문
닿을 수 없는 이름을 꼬리라고 불러볼게요
노포 차량기지, 멈춘 열차 안에 앉아 있을 때
순식간에 지나간 짧은 횡선을 보았거든요
스친 인연도 그랬습니다
땅바닥에 밤꽃이 뒹구는 것처럼
나무들이 꽃잎을 내리는 저린 밤처럼
흔적이 흔적을 덮어버렸죠
유성이 내린, 어딘지도 모르는 방향을
한참 바라보는 이유가 6월생이기 때문일까요
밤은 마음보다 쉽게 내려앉네요
꽃 진 자리를 메우며
기차는 늘 떠날 준비를 하는데
나는 남아서
다시 사랑을 시작하듯 여름에 매달리고요
자국은 있는데 잡을 수 없는 꼬리처럼
빈 밤이 새벽으로 흘러갑니다
고개를 돌리는 옛 얼굴을 짧게 보았습니다
- 「밤꽃 아래 유성의 궤적」 전문
비틀린 모서리에 달빛이 닿아도 둥글어지지 않았다
닳는다는 건 몇 겹 껍질을 벗어내는 일이겠지
흙길을 구르고 물길에 쓸리고 계절에 튕길 때마다
먼저 가신 아버지, 왜 등이 둥글어졌는지 알 것만 같은데
모난 곳 조각난다고 가벼워지는 건 아니겠지
등이 무거워져 둥글어질 수도 있는 거겠지
- 「모난 돌」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노병희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2015년 계간 ≪부산시단≫으로 등단했다. 2019년 고성 디카시 입상했으며, 사진으로는 제2회 ‘부산 어묵 사진’ 공모전 대상, 제12회 ‘건설근로자 사진‘ 공모전 대상 외 다수 수상했다. (사)한국디지털사진가협회 추천작가이며, 부산국제사진제 사무국장 역임, 현재는 자문으로 있다.
목차
1부
사춘기/ 모난 돌/ 지켜주고 싶은 것들/ 이름을 적지 못했습니다/ 무릎 연골은 관절염 3기/ 혼술, 서울의 불빛 아래/ ND400/ 어떤 떨림/ 섬진강 누나/ 밤꽃 아래 유성의 궤적/ 흰죽/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갈등
2부
꽃 공양 자리/ 기도/ 장터의 끝자락 / 이태원, 멈추지 않는/ 단풍잎 할머니/ 산사 가는 길/ 부처를 보다/ 아직 웃는 이유를 모르고/ 인편鱗片/ 기도 삼매/ 비우다
3부
그림자의 무게/ 기일에/ 시월 그믐/ 처서 다음 날/ 비정규직 김 씨 1주기/ 겨울을 견디는 이유/ 태종사 출사를 기다리며/ 탈상/ 시간을 지나는 마당/ 파리 여행/ 학춤에 물든 금정산/ 흐린 영락공원에서
4부
초야/ 그녀/ 열쇠 없는 방/ 비워놓은 시간/ 가을 사람/ 모래 그림/ 기다릴게요, 나사리에서/ 흐르는 종착역/ 봄비 오는 날/ 착각/ 영도다리/ 꽃은 이렇게 핀다/ 다시 여기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