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리나가 몸이 이상하다고 전화한 것은 달여행을 다녀온 후 삼 개월이 가까워지는 어느 날이었다. 한여름의 무더위에 굵은 땀을 흘리며 연습에 집중하고 있을 리나의 갑작스러운 영상 호출에 치우는 깜짝 놀랐다. 가을맞이 창작무용극의 공연 준비로 극단 인근에 숙소를 마련하고 늦은 시간까지 연습실에 살다시피 하는 리나를 본 지도 오래였다. 국립무용단의 인턴 무용수에 불과한 리나가 이번 공연에서 꿈도 꿀 수 없는 배역에 캐스팅된 것은 모두 달여행 덕분이었다. 땅에 기반을 둔 인류가 하늘로 올라서고, 우주를 향해 나아간다는 무용극의 핵심은 무중력 상태에서의 춤사위 장면이었다. 극단에서 무중력 환경을 경험한 무용수는 이번에 달여행을 다녀온 리나가 유일하였다.
-「달아, 밝은 달아」에서
*어스러진 달빛
널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침대 위에 미라를 눕혀 놓은 줄 알았어. 죽은 사람의 몸을 방부 처리한 후, 아마포로 칭칭 감아 놓은 시신 말이야. 고대 이집트의 신전 벽화에서나 볼 수 있는 공포의 대상이지. 너는 그렇게 온몸이 하얀 붕대로 감긴 채 병원 침상에 팽개쳐져 있더군. 담요 밖으로 삐죽이 나와 있는 다리 하나를 보고서야 숨이 붙어있는 사람이라고 알 수 있을 정도였어. 내가 마주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어. 불과 몇 달 전 내 곁에서 집안일을 거들던 녀석이 그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거든. 넋이 빠져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어. 그런 내 눈에 침대 시트 한쪽을 적시고 있는 붉은 핏빛이 들어왔어. 눈이 부시도록 선명한 색상이었지. 어릴 적 시골집 채소밭에서 본 적이 있는 양귀비꽃이 내뿜는 붉은 색이었어. 배앓이하시는 할머니 때문에 동네 사람들 몰래 몇 뿌리 심어 놓은 뒤뜰 모퉁이의 꽃이었지. 네 허리에 감긴 하얀 붕대에서 배어 나오는 양귀비꽃을 닮은 진한 핏빛을 보고서야 정신이 돌아왔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어. 숨이 막혀 왔어. 네가 아니라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어. 누군가에게 확인하기 전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어. 주변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내 눈에 병실의 참상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밀려왔어. 아수라장이 따로 없더군. 머리를 온통 붕대로 감고 눈만 내어놓은 사람, 깁스한 다리를 침대 위에 길게 늘어뜨리고 꼼짝도 못 하는 사람, 등의 상처로 돌아눕지도 못해 엎드린 채 숨을 헐떡이는 사람… 전쟁이 한창인 야전병원의 피비린내 나는 현장 그대로였어. 앳된 얼굴의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어. 그들이 토해내는 신음이 황량한 병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어.
“학생의 아버지인가 보네요. 장대 같은 아들이 그렇게 누워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지요.”
맞은편 침상에서 젊은이의 어깨 상처를 닦아주던 부인네의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어.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려는 것을 학생 누나가 울면서 어찌나 애원하던지. 그렇지 않았다면 그 학생은 벌써 지하실로 내려갔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침상 모서리에 붙어있는 환자 인식표로 눈길이 갔어. 네 이름이 틀림없더군.
“그래도 그 학생은 일찍 실려 와 수술이라도 받았으니 다행이죠. 다른 사람들은 복도에서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죽어 나갔어요. 한두 사람이 아니에요.”
불과 보름 전쯤의 일이라고 부인네는 몸서리를 쳤어.
그것만이 아니었어. 나를 알아보고 쫓아온 네 누나를 보고는 정신이 아득해져 그만 주저앉을 뻔했어. 깁스한 왼쪽 팔을 어깨 줄로 지탱하고, 다리까지 절룩거리며 다가왔지. 어깨를 감은 붕대에서는 붉은 피가 셔츠 아래로 드러나고, 부기가 빠지지 않은 얼굴은 짙은 피멍이 그대로 보였어. 이십여 년 동안 키워 온 내 자식의 모습이 아니었어. 비명 같은 신음이 내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어. 딸의 이름을 불러줄 생각도 못 하고 한동안 쳐다보기만 했어. 그러는 내가 더 서러웠든지 네 누나는 소나기 같은 눈물을 쏟아내더군. 자기 때문에 동생이 저렇게 되었다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울부짖더군.
그해 오월을 들끓게 했던 광주의 도심 거리가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너는 꼼짝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고 했어. 하지만 네 누나가 퇴근길에 시위 현장을 지나다 경찰에 구타당해 병원에 실려 와 있는 것을 보고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했어. 낮에는 병원에서 네 누나를 간호하다가, 밤이 되면 거리로 달려가곤 했대. 네 누나가 퇴원한 뒤에는 학원도 나가지 않고 쫓아다니곤 했대.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너를 병원에서 겨우 찾을 수 있었대. 군인들에게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의식조차 없었대.
작가 소개
지은이 : 임재학
1988년 대학 졸업 후 35년간 금융기관에 근무2019년 단편소설 「평촌댁, 집으로 돌아가다」 발표2020년 이후 계간지 《부산 가톨릭문학》에 몇 편의 단편소설 발표2025년 소설집 『달아, 밝은 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