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 발문 중에서
새로운 날갯짓으로 꿈을 펼친다
증재록(한국문인협회 홍보위원)
서두르지 않고
늦추지도 않는다
가는 길 어차피 무량수에 이르지 못할 길
여기 어디쯤일까
친구 등에 올라타던 담벼락을 지나고
나뭇가지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골목을 돌아나가면
마당에서 계절을 재던 바지랑대는
하늘만 쳐다보고
동구 밖 고목은 껍질을 벗고도
털어내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돌려 감고
탱자나무 울타리는 바람에 가시를 빼앗기고 주저앉아 있는
그걸 묻은 기억
이제는 지나온 만큼 잊어야 앞으로 나간다고
훌훌 턴다
머리에 얹혔던 새참의 무게도 풍선처럼 날아오른다
저 멀리서
어린 시절이 어서 가라고 손짓한다
앞은 여전히 훤하게 열려있다
— 「지금 걸어간다」 전문
여기는 어디? 저기는 뭣 하는 곳인지 따지지 않는다. 모두 살아가는 아름다운 터니까, 털어내지 못하는 동심이란 순수해서다. 삶의 이치가 배어있는 농촌, 순리를 몸에 익혀 큰 욕심은 없다. 함께 사는 거, 살리고 먹고 오늘을 맞는 거, 길목은 모두 아름다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짝은 침묵인 듯 숨소리 여유롭다. 계절마다 그에 맞는 춤사위가 술렁거리고 자연에 맞춰나가는 섬세한 듣기와 예민한 감각이 건강이다.
3. 꿈은 빛난다
고요한 부용산의 줄기를 타고 태어난 김선옥 시인은 그의 일상과 시상이 함축된 시명 ‘난아’라고 부른다. 난 아람 진 세상을 돌아 아름다움을 가꾸며, 난 아름드리 수가 많고 껴안을 일과 익혀야 할 일이 많아, 난 그걸 다 알고 있다며 짓는 미소, 그만큼 내다보는 혜안이 깊은 시인. 그거 알아? 난 다 안다. 그때의 그 속을 미리 내다본다. 뜨거움이 스며들고 그만큼 달리고 또 올라서서 펼치는 열기는 사방으로 뻗친다. 난 이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하는가를 세운다.
슬기와 신중을 구슬처럼 빛내며 착하게 품고 시가 주는 행복을 소망한다. 삶의 이치란 동글게 살아 온갖 풍경을 담는 것, 수평에서 수직으로 오르는 줄기 따라 피운 꽃은 순수하고 꽃잎은 활활 보라로 펼친다. 순발력으로 나선 앞에서 뒤를 돌아보며 질곡을 헤치는 흙의 소리를 새긴다. 맥고자를 쓰고 잠방이에 호미를 들고 흙을 간다, 땀방울이 동근 것은 땅속을 보고서다. 밤의 어둠과 낮의 빛 사이 색깔은 고독을 떠올린다.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새기면 씨로부터 열매까지 피고 맺는 사이가 부푼 희망이다. 사이와 사이에는 밤이 들어서고 별이 뜬다. 빛살이 쏟아지는 별과 별의 은하수를 바라보며 날개 펴고 오른다. 내다봐도 돌아봐도 들판이다. 밭을 질척하게 가꾸는 땀, 기다림과 가버리는 사이에서 잔잔한 들녘의 바람을 맞는다. 익어가는 열매가 총총 빛나 넉넉한 여백을 푸르게 가꾸는 숨결이 오늘의 빛나는 꿈이고 행복이다.
빛으로 그리는 낙서
흑과 백의 사이엔 연결 고리가 있다
수많은 빛과 그림자가 결을 따라 긋는 선
변함없는 회색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가끔 갈라진 틈으로 쏟아 들어오는 빛살이
그림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소리 없이 잠식된다
여기도 저기도 아닌 무표정하게 머무는 낙서
바람에도 끄떡없고
물에도 희석되지 않는 농도
마음속 울림이 질척하다
아침이 잠을 깨우고
손가락을 내세워 빛을 갈망하는 낙서
세웠다가 쓰러트리고 손을 털면 가벼워
또 다른 낙서로 움켜쥘 수 있는 날
다 얻은 느낌으로 부자가 되는 건
낙서 잘하기
어쩌면 그런 거 아닐까
남겨진 것들의 생각
너를 처음 만날 날
잘 짜인 각본처럼
제법 폼나게 묵직하였는데
시리도록 엷어진 몸이
문틈 새로 들어오는 바람에
줏대 없이 팔랑거린다
홀로 설 수 없어
오직 벽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시계 초침 소리가 깊어질 때마다
화려했던 날의 옷을
미련 없이 버리고 주저 없이 벗으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몸을 낮추고
가만히 귀 기울여
그들의 속삭임을 듣는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김선옥
충북 음성 출생한국작가 등단짓거리시문학회원짓거리시세상회원사진 활동시집 『길을 연다』동인지 『귀를 열면 길이 열린다』 등 다수시화비_응천 변 <용계리 여전히 빛난다>시화비_백야호반 <나뭇가지 사이로>음성뉴스 등 신문에 정기적으로 시 발표2025 충북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 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