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정전협정일인 1953년 7월 27일까지 이어졌다.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은 정전협정일 전후로 남한으로 돌아왔다. 8,300여 명은 교환 사병, 교환 국군포로, 귀환 용사로 불린다.
이 책은 ‘교환’ 국군포로 구술집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은 대부분 교환 국군포로에 관심이 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정부가 구출한 사람들이니 비교적 편하게 살았으리라 여겨 눈길을 주지 않는다. 교환 포로는 어쨌든 살아 돌아온 사람 아닌가. 정전협정 이후 북한에 남은 국군포로는 5만~10만 명에 달했다. 억류된 국군포로들은 개인적으로 탈북해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총 80명이 한국으로 귀환했다. 우리 사회는 이들을 ‘귀환’ 국군포로라고 칭한다.
기자였던 저자는 2013년 5월 ‘귀환’ 국군포로를 만난 뒤 한동안 그들에 대해 생각했다. “40년 넘게 북한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는 그들의 삶은 참혹했다. “나만 살아서 돌아와 미안하다”던 그들은 동료의 아픔을 증언했다. 당시 첫째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고 있고 둘째 아이를 배에 품고 있어서인지 인간의 아픔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들의 말을 글로 옮겨두고 싶었다.
출판사 리뷰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정전협정일인 1953년 7월 27일까지 이어졌다.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은 정전협정일 전후로 남한으로 돌아왔다. 8,300여 명은 교환 사병, 교환 국군포로, 귀환 용사로 불린다.
이 책은 ‘교환’ 국군포로 구술집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은 대부분 교환 국군포로에 관심이 없다. 설령 안다고 해도 정부가 구출한 사람들이니 비교적 편하게 살았으리라 여겨 눈길을 주지 않는다. 교환 포로는 어쨌든 살아 돌아온 사람 아닌가.
정전협정 이후 북한에 남은 국군포로는 5만~10만 명에 달했다. 억류된 국군포로들은 개인적으로 탈북해 1994년부터 2010년까지 총 80명이 한국으로 귀환했다. 우리 사회는 이들을 ‘귀환’ 국군포로라고 칭한다.
기자였던 나는 2013년 5월 ‘귀환’ 국군포로를 만난 뒤 한동안 그들에 대해 생각했다. “40년 넘게 북한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다”는 그들의 삶은 참혹했다. “나만 살아서 돌아와 미안하다”던 그들은 동료의 아픔을 증언했다. 당시 첫째 아이에게 모유를 먹이고 있고 둘째 아이를 배에 품고 있어서인지 인간의 아픔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들의 말을 글로 옮겨두고 싶었다.
돌아오지 않은 군인을 아들로 둔 어머니들을 떠올리며 마음 앓이만 했다. 일은 2019년 언론사를 그만두고 나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귀환 국군포로와 관련자들을 인터뷰해 2021년에 논문을 썼다. 일반인이 이 내용을 알기 바라며 취재를 보완해 2023년 귀환 국군포로 9명의 이야기를 담은 구술집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깊은바다 돌고래)를 펴냈다.
나는 책을 만들면서 지쳐버렸다. 타인의 슬픔을 듣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시원한 바람만 맞아도 죄책감이 들었다. 구술해준 어르신들에게 책을 선물했는데,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책을 받아 보셨다. 이 작업이 그분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어느 날부터 지금 인터뷰하지 않으면 안 될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누구일까? “북한에 국군포로들이 남아 있었다”는 말을 해줄 사람이 누구일까? 정전협정 전후에 돌아온 국군포로 8,300여 명이 떠올랐다.
나는 2023년 가을부터 2026년 봄까지 교환 포로 생존자를 수소문했다. 6·25전쟁 관련 단체에 연락하고 책과 기사를 뒤적이며 해당자를 찾았다. 6·25전쟁 참전자는 본인이 원하면 6·25참전유공자회에 가입한다. 특별한 상을 받거나 크게 다치면 대한민국무공수훈자회, 대한민국상이군경회 회원이 된다. 단체들은 각각 전국에 230여 개 지회가 있는데, 나는 지회에 연락해 교환 포로가 있는지 물었다. 두 단체는 거의 다 연락했고, 상이군경회는 50여 개 지회에만 전화하곤 지쳐서 그만뒀다. 결과적으로 교환 포로 생존자 13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환 포로들의 커밍아웃은 쉽지 않았다. 세상에 포로 경험을 공개하려면 당사자의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군대에서 “포로가 되느니 죽음을 택하라”는 교육을 받은 뒤 포로가 됐던 터라 어르신들은 지금까지도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분들은 ‘교환 포로로서 경험한 일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과 ‘과거를 지우고 싶다’는 상반된 마음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4명은 섭외 과정에서 인터뷰를 거절하셨다. 부산에 있는 분과 서울에 있는 분은 건강상 이유로 자녀들이 인터뷰를 거부했다. 경기도에 사는 분은 6·25참전유공자회 지회 직원을 통해 설득해봤지만 인터뷰 거절 의사를 밝히셨다. 전라도에 사는 분은 찾아가 뵈었으나 “지금은 그 일을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3명은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도중에 그만두셨다. 책에는 6명의 이야기만 담았다.
나는 교환 국군포로들을 만나며 초기에는 북에 억류돼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 이야기를 주로 듣고 싶었다. 하지만 교환 포로들과의 만남을 이어가면서 남으로 돌아온 사람들 역시 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많은 분이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들을 생각하며, 전쟁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교환 포로들의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좋겠다.
얘들이 나를 도망병으로도 맨들어놓고, 원대 복귀를 하라고 했는데 하지 않았다고 해 가지고 나를 이등병으로 강등을 시켰어. 근데 난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내가 제대증도 다 있고 그런데, 부대로 복귀 안 했다고 해서 미복귀자로 육군 이등병으로 강등시켜, 탈영병으로 해서 강등시켜. 준위가 왜 탈영병이 돼? (당시 내 계급은) 상사, 그때는 상사는 그냥 앉아서, 휴전되고 앉아서 밥 먹는데 왜 도망을 가? 그러니까 말도 안 돼.
-최명혁
김 소위란 사람이 잘 때 나를 오라고 그러더라고. 불침번 시켜서 나를 깨워서. 그래 딱 갔지. “최 동무, 나쁜 일 한 일 없어?” “소금 한 가마니 훔쳤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가 먼저 얘기해. “다른 사람은 자기 죽을까 봐 자기 친구를 고발하는데 아, 이거는 최 선생 같은 경우는 동료를 살리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건 참 내가 감탄하겠소.” (목이 메어) “어떤 마음에서 이런 일을 했느냐?” 이 사람이 먼저 털어놓는 거야. 이 정도 되면 별 단 사람 다 떼야 해요. 큰일인데 막 혼내키더라고. 인계받아 가지고 입건시키려고 그랬던가 봐. “내가 한 가지 감탄한 일이 있다.” 탁 무릎을 꿇더라고. 그러면서 떡 먹던 찌끄러기 이런 거 꺼내면서 “이거 내 먹던 거지만, (울먹이며) 형님 오면 같이 먹으려고 했다”. (중략) 그 얘기하니 눈물 나. 그런데 (이런 나한테) 이렇게 한다는 건 이 사람들이 너무 잘못해. 사람들이 소금 필요하니까, 사람들이 붓고 하니까 나물 데칠 때 쓰려고 (훔쳤지).
-최명혁
기차로 와서 개성에서 3일 묵었어. 대우는 좋았어. 허연 쌀밥에 고깃국도 주고, 매일 목욕 한 번씩 시켜주고. 거기서 아까 얘기했지? 요만한 조명탄에서 떨어진 손수건 같은 거 주워 가지고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그래서 개성서 떠날 때 아침에 목욕 다 하고 홀딱 벗겨 가지고, 군복 싹 갈아입혀 가지고. 차 군용 트럭를 탈 때마다 이름 불러서 차를 타고. 좋고 말고. 그 기분은 참말로…. (개성에서) 차를 타고 판문점을 향한다고. 이름을 부르고 차에 탈 때는 날아가는 기분이고. 판문점에 와 가지고, 또 우리 때 와서 목욕 싹 하고 군복 싹 갈아입히고 돼지고기, 비빔밥에 점심 주는데 ‘이 하늘이 대한민국 하늘이 맞는가?’. 그래 국군 군악대에 맞춰 애국가를 부를 때 ‘동해물과 백두산’까지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이제는 울음, 울음바다. 군악대만 시종일관. 그렇게 나라 잃은 서러움이…
-故 남병식
작가 소개
지은이 : 이혜민
경기도 여주에서 돼지농장을 하는 부부의 둘째 딸로 1982년 삼일절에 태어났다. 이화학당의 자랑인 유관순 열사를 동경하며 이화여자대학교에 들어가 정치외교학을 공부했다. 2007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해 〈신동아〉, 〈주간동아〉에서 마이너리티를 취재했다. 2012년 일제 징용 피해자 유해 발굴 현장인 사할린, 위안부 흔적이 남은 사이판과 팔라우를 찾아갔다. ‘가해자에게 사과받지 못하는 현실’보다 ‘피해 실태조사가 미흡한 현실’이 더 안타까웠다. 2013년, 6·25전쟁 귀환 국군포로들에게 마음이 갔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기사로 싣지 못해 논문으로 담아내자 싶었다. 이듬해 육아휴직을 받아 고려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회학과(석사과정)에 들어갔다. 복직해 논문 작성을 미루는 사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인터뷰했다. 전 전 대통령에게 5·18에 대한 책임을 물은 뒤 책무라는 단어의 무게를 알게 됐다. 영화 〈군함도〉를 계기로 군함도를 취재했다. 군함도 피해자 6명은 만날 수 있겠다 싶었다. 단행본 《기록되지 않은 기억 군함도》(2018) 책날개에 ‘귀환 국군포로 40여 명을 취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고 적은 것은 제비가 ‘시간’을 물어다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책 곳곳에 ‘전쟁의 참혹함을 기록하는 데 인생을 걸겠다’는 포부를 적어놨지만, 건강이 나빠져 2019년 회사를 떠났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기자 직함을 잃은 대신 시간을 얻었다. 코로나 사태가 한창인 2020년 민폐인 줄 알면서도 귀환 국군포로들의 인터뷰를 진행해 논문 〈한국전쟁 귀환 국군포로 구술사 연구〉(2021)를 작성했다. 2023년 출판사를 만들어 귀환 국군포로 9인의 구술집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를 펴냈다. 지금은 두 아이를 키우며 그 포부를 안은 채 나아가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04
북에 억류된 국군포로들을 떠올리며 작업을 이어갔다
1. 최명혁 18
“그 얘기하니 눈물 나. 그런데 이렇게 한다는 건 이 사람들이 너무 잘 못해”
2. 故 남병식 74
“살아 있는 전우들이 혹은 연락이라도 된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어”
3. 故 강성렬 118
“인간에 대한 각오라고 할까. 국군으로서 활동했을 때가 가장 가치 있었습니다”
4. 서상준 168
“북한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하고 고생하는 전우들 좀 데리고 왔으믄…. 그것뿐이에요”
5. 전귀상 214
“생지옥까지… 그렇게 고생해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 없고, 그게 억울해요”
6. 이영숙 260
“나는 선생을 했기 때문에 학생들한테 불명예스러운 건 알리지 않을라고 했어”
미주 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