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번 《청색종이》의 ‘특집’ 주제는 ‘제노사이드와 문학’이다.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을 말살하기 위해 자행된 광범위한 범죄 행위를 뜻하며, 민족성, 문화, 영토 등을 모조리 파괴하는 폭력을 가리킨다. 김지윤의 「침묵하는 신과 응답하는 인간」은 전쟁의 승리가 우선시되는 과정에서 제노사이드를 비롯한 폭력이 부차적 요소로 취급되는 현실을 비판한다. 전쟁문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책임과 실천을 상기하는 계기가 된다.
홍기돈의 「제노사이드를 증언하는 까마귀 울음과 한 방울의 사탕」은 제주4·3사건을 제노사이드로 명시하며, 문학이 법 제도에 투영되지 않는 현실을 재현하는 역할을 짚는다. 서사 양식과 서정 양식의 차이를 통해 제노사이드의 경험을 드러내며, 김수열의 『날혼』은 제주도민의 감정과 경험을 발화하는 형식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번 호에는 박성현 시인을 기리는 ‘추모 특집’과 함께 대표작 및 시 세계에 대한 조명이 수록되었다.
김언 시인의 시와 해설, 나희덕 시인과의 대담, 정호승의 「선운사」를 새롭게 읽는 비평, 연재 산문과 시집 해설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제노사이드를 말하는 행위 자체와 말하는 방식을 숙고한다. 침묵하지 않는 실천, 그리고 문학이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이야기를 요구하는 목소리이자 그 요구를 지속하게 만드는 불씨가 되기를 소망한다.
출판사 리뷰
제노사이드와 문학:
전쟁의 스펙터클과 여실한 재현 사이에서
전후 체제가 만들어낸 지정학적 구획 속에서 한국은 하나의 섬이었다. 육로로는 어디에도 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미래조차 단절된 것만 같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사회는 이 상흔을 극복하고자 분투해 왔다. 포화가 지나간 자리에 번화한 빌딩과 거리가 들어섰고, 공항과 항구가 세워졌으며, 이제는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해 한국인이 만든 노래와 영화가 세계로 뻗어 나간다. 이로써 한국 역사에서 한국전쟁으로 인한 폐허의 이미지와, 이른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재건과 재생의 이미지는 한 쌍을 이룬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단순한 기억의 짝을 넘어, 전쟁을 이해하는 고정된 틀이 되기도 한다. 폐허 뒤에는 재건이 뒤따른다는 서사는 한국 사회의 산업화 경험에 비추어 강력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 이국에서 벌어지는 전쟁 또한 일시적인 사건이며, 전쟁만 끝난다면 그들의 삶이 회복되리라는 막연한 낙관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 편견은 어떤 참상은 국가를 파산시키고, 어떤 잔혹은 민족에게서 고향을 빼앗고 그 민족 자체를 사라지게 만든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폐허 이후에 재건이 뒤따른다는 스펙터클은 우리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또 다른 섬이다.
이번 《청색종이》의 ‘특집’ 주제는 ‘제노사이드와 문학’이다. ‘제노사이드’(genocide)는 유대인 출신의 법률가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 1900 ~ 1959)이 1944년을 전후로 창안한 용어로 특정 집단을 말살하기 위해 자행된 광범위한 범죄 행위를 뜻한다. 이는 초기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해석하면서 정립된 법률 용어였으며, 비슷한 의미를 지닌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라는 법률 용어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폭력을 뜻하는 데 반해, 렘킨의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을 구성하는 민족성, 문화, 영토 등을 모조리 파괴하는 광범위한 폭력 행위를 가리키는 데 차이가 있다.
제노사이드를 다룬 두 편의 글은 전쟁에 대한 관습적 사유를 넘어서게 하는 힘을 지닌다. 김지윤의 「침묵하는 신과 응답하는 인간」은 전쟁의 승리가 우선시되는 과정에서 제노사이드를 비롯한 폭력이 부차적인 요소나 스펙터클로 취급되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논의한다. 안전한 장소에서 전쟁 사진을 감상하는 현대인의 태도와 “인간의 실존을 무미건조한 데이터로 치환하는” 현대전의 원거리 무기에는 똑같이 타자를 추상화하는 메커니즘이 내포되어 있다. 반면 ‘전쟁문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책임과 실천을 상기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한국·미국·우크라이나의 전쟁시를 폭넓게 살피며, 그로부터 타자의 고통을 섣불리 대신 증언하지 않기 위한 신중함과 그 참혹한 고통에 여실히 가까워지려는 각오를 동시에 읽어 낸다.
홍기돈은 「제노사이드를 증언하는 까마귀 울음과 한 방울의 사탕」에서 제노사이드가 한국에서도 자행된 사건이었음을 명시한다. 제주4·3사건은 국가 제도에 의해 제주도민이 체계적으로 학살된 사건일 뿐만 아니라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하고 제주 공동체를 파괴하는 제노사이드이기도 했다. 홍기돈은 문학의 역할이 법 제도에 투영되지 않는 현실을 재현하는 데 있다고 판단한다. 이때 서사 양식과 서정 양식에는 차이가 있다. 서사 양식의 경우 법 제도의 인과적 빈틈을 복원하는 데 유효한데, 서정 양식의 경우 시인이 집단의 대변자·대표자로서 그 생각과 감정을 노래하게 된다. 따라서 김수열의 『날혼』(삶창, 2025)은 제노사이드를 경험한 제주도민의 감정과 경험을 발화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더불어 이번 호에는 박성현 시인을 기리는 ‘추모 특집’을 기획하였다. 박성현은 2009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하여 세 권의 시집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문예중앙, 2018)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문학수첩, 2020) 『그 언덕의 여름, 바깥의 저녁』(청색종이, 2025)을 남겼다. 이십 대부터 고인의 문우였던 한용국 시인의 글을 빌려 박성현 시인께 기리는 마음을 바치고자 한다. 또한 박성현 시인의 대표작을 수록하고, 최다영 평론가가 박성현 시인이 투병 와중에도 “두려움을 숨기지 않되 그것을 과장하지도 않”으며 견지한 그의 시 세계를 조명하였다.
‘시:인’ 코너에는 김언 시인을 초대하여 그의 시 「창문 너머의 것」 외 3편을 소개하였다. 이를 인아영 평론가가 시인의 인식론적 태도에 초점을 맞추어 해설하였다. 이에 따르면, 김언의 근작은 “세계를 응시하고, 기록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를 취하면서, 세계와 섣부르게 화해하지 않는 윤리적 시험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신작시를 발표해 주신 김수열·성향숙·김남극·김미령·조혜은·김종연·채길우·안수현·송희지·오산하 시인께 감사드린다. 시인들이 구축한 독자적 언어와 감각은 동시대의 사유를 다층적으로 확장하며, 이를 통해 한국 시단이 품은 활력과 폭넓은 결을 느끼도록 해줄 것이다.
대담 ‘오직 나는 시인이다’에서는 이재훈 편집위원이 나희덕 시인을 인터뷰하였다. 이를 통해 시인의 뿌리가 되는 유년기의 심상부터 예술적 고뇌와 에코페미스트로의 지향에 이르는 내면의 도정을 생생하게 접하게 된다. 또한 ‘CROSS’ 코너에서는 김욱동 평론가가 정호승의 「선운사」를 신유물론의 틀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이러한 대담과 비평은 현대시의 외연을 확장하여, 작품을 작가의 육성이나 더 넓은 학문적 맥락에 접할 수 있도록 만든다.
세 편의 연재 산문도 이어간다. 열일곱 번째 ‘문정희의 유랑 언어’는 삶에 감사한다는 의미의 스페인어 ‘Gracias a la vida’를 제목으로 취했다. 여권을 소지하는 것조차 드물었던 1980년에 인도 여행을 떠나서 겪은 고초와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외신을 듣는 사건이 교차하며, 개인적 삶과 역사적 사건 사이에서 예술가로서 삶을 다잡으려했던 과정이 내밀하게 그려진다. 또한 김태형의 열여섯 번째 ‘엣세이 최승희’인 「그 무렵의 사진들」을 수록했다. 이번 호에는 일본의 여성지 <주부지우>에 게재되었던 최승희의 사진들을 수록하였으며, 특히 도약무용 사진을 통해 최승희 무용의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하창수의 시인들’에서는 네 번째 시인으로 이상을 다루었다. 천재로 불리었던 이상의 캐리커처와 그의 작품을 독서하며 느꼈던 감동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청색지가 선택한 이 계절의 시집’은 전영관의 『에덴 입장권』(청색종이, 2025)와 안도현의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문학동네, 2025)이다. 정은경 평론가의 깊이 있는 해설을 통해 두 시집의 사상적 의의와 형식적 특징을 고루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계절평’에서는 정우주 평론가가 2025년 겨울에 발표되었던 작품 중에서도 김보나·변혜지·조온윤·고선경 시인의 시에서 화자가 지닌 특징을 세심히 분석하였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제노사이드를 주제로 삼았다. 중요한 것은 제노사이드를 말한다는 행위 자체, 그리고 숙고할 것은 말하는 방식일 것이다. 법률학자이자 논픽션 작가인 필립 샌즈는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의 서문에서 인류가 보편적으로 ‘잔학함에 직면했을 때 침묵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인간에게는 그러한 냉담함뿐만 아니라 “더욱 위대한 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인간 행위에 대한 서사를 원하는 우리의 욕구” 또한 존재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마찬가지로 출발점은 침묵하지 않는 실천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문학이 인간에 대한 더 나은 이야기를 요구하는 목소리이자 그러한 요구를 지속하게 만드는 불씨가 되기를 소망한다.
목차
청색지신인상 공모 270
정기구독 안내 271
2025 청색의 밤 축사 문정희 14
기획의 말 제노사이드와 문학: 전쟁의 스펙터클과 여실한 재현 사이에서 23
소설가 하창수의 시인들 4
이상 하창수 8
특집 제노사이드와 문학
익명화된 죽음과 집단 살상의 논리 김지윤 30
제노사이드를 증언하는 까마귀 울음과 한 방울의 사탕 홍기돈 55
시:인 김언
신작시 창문 너머의 것 74
족보 77
자선시 어디서 구멍이 났는지 모른다 78
관찰자 80
작가론 정지된 수행의 시 인아영 82
오직 나는 시인이다 3
인간, 영원히 알 수 없지만 다가가게 만드는 나희덕 × 이재훈 94
신작시 우리 시대의 시인들
우주로 간 아빠 김수열 120
쉼표를 맡겨 봐, 느낌표로 만들어 줄게 성향숙 122
겨울 숲 자락 김진환 124
소머리를 써는 저녁 김남극 126
저녁 들판의 외침 김미령 128
이쿼녹스 오디션(Equinox Audition) 조혜은 131
메들리 김종연 135
우리 동네 채길우 140
금속음 송희지 143
돌우물 오산하 154
겨우살이 안수현 157
문정희의 유랑 언어 17
생에 감사해, 그라시아스 알라비다! 문정희 162
엣세이 최승희 16
그 무렵의 사진들 김태형 180
추모 시인 박성현
추도사 시인 박성현을 기억하며 한용국 192
대표시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외 2편 박성현 199
평론 심해에서 자라는 숲 최다영 209
비평 CROSS
정호승의 「선암사」: 신유물론적 접근 김욱동 224
리뷰 청색지가 선택한 이 계절의 시집
인간은 체념의 상태에서만 대화에 임해야 한다 정은경 240
- 전영관, 『에덴 입장권』(청색종이, 2025)
- 안도현,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문학동네, 2025)
시선 청색지가 선택한 이 계절의 시
쓰(이)는 ‘나’들
- 2025년 겨울의 시 정우주 272
필자 약력 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