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부모님 > 부모님 > 소설,일반 > 역사
우리는 나라를 회복할 것입니다  이미지

우리는 나라를 회복할 것입니다
독립운동가 45인의 말
창비 | 부모님 | 2025.08.15
  • 정가
  • 17,000원
  • 판매가
  • 15,300원 (10% 할인)
  • S포인트
  • 850P (5% 적립)
  • 상세정보
  • 12.8x18.8 | 0.347Kg | 248p
  • ISBN
  • 9788936480912
  • 배송비
  • 2만원 이상 구매시 무료배송 (제주 5만원 이상) ?
    배송비 안내
    전집 구매시
    주문하신 상품의 전집이 있는 경우 무료배송입니다.(전집 구매 또는 전집 + 단품 구매 시)
    단품(단행본, DVD, 음반, 완구) 구매시
    2만원 이상 구매시 무료배송이며, 2만원 미만일 경우 2,000원의 배송비가 부과됩니다.(제주도는 5만원이상 무료배송)
    무료배송으로 표기된 상품
    무료배송으로 표기된 상품일 경우 구매금액과 무관하게 무료 배송입니다.(도서, 산간지역 및 제주도는 제외)
  • 출고일
  • 품절된 상품입니다.
  • ★★★★★
  • 0/5
리뷰 0
리뷰쓰기

구매문의 및 도서상담은 031-944-3966(매장)으로 문의해주세요.
매장전집은 전화 혹은 매장방문만 구입 가능합니다.

  • 도서 소개
  • 출판사 리뷰
  • 작가 소개
  • 목차
  • 회원 리뷰

  도서 소개

1945년 8월 15일로부터 여든해가 지났다. 한 사람의 일생만큼 흐른 이 시간 동안 우리나라는 전쟁과 갈등, 가난과 독재를 딛고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줄곧 나라 잃은 상처와 그것을 회복해낸 역사가 숨 쉬고 있었다. 『우리는 나라를 회복할 것입니다』는 그 역사를 되새기고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가장 크게 헌신했던 45명의 어록을 모은 책이다. 김구, 안중근, 안창호 등 대표적인 독립투사들은 계급과 성별, 종교와 사상이 서로 달랐지만 나라를 회복하겠다는 한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불태웠다.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어제 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곧 오늘 나라를 회복할 자”(안창호)라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나아간 그들의 의지와 비전은 계속해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가야 할 오늘날의 시민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교과서에서 딱딱하게만 접해온 독립운동가들의 육성을 직접 읽으며 광복 80주년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1945년 8월 15일 그 순간 우리 민족 전체가 느꼈을 충만한 기쁨을 상상해보자.

  출판사 리뷰

독립운동가들이 우리에게 남긴
신념과 용기의 말들을 직접 읽는다

1945년 8월 15일로부터 여든해가 지났다. 한 사람의 일생만큼 흐른 이 시간 동안 우리나라는 전쟁과 갈등, 가난과 독재를 딛고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줄곧 나라 잃은 상처와 그것을 회복해낸 역사가 숨 쉬고 있었다. 『우리는 나라를 회복할 것입니다』는 그 역사를 되새기고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가장 크게 헌신했던 45명의 어록을 모은 책이다. 김구, 안중근, 안창호 등 대표적인 독립투사들은 계급과 성별, 종교와 사상이 서로 달랐지만 나라를 회복하겠다는 한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불태웠다. 비록 나라를 잃었지만 “어제 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곧 오늘 나라를 회복할 자”(안창호)라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나아간 그들의 의지와 비전은 계속해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가야 할 오늘날의 시민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교과서에서 딱딱하게만 접해온 독립운동가들의 육성을 직접 읽으며 광복 80주년의 의미를 생각해보고, 1945년 8월 15일 그 순간 우리 민족 전체가 느꼈을 충만한 기쁨을 상상해보자.

“비록 복잡하고 어려운 길일지라도
그것이 바른 길이라면 그 길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 김구의 말

이 책에 어록을 수록한 45인의 독립운동가들은 명실상부 지도자로서 독립운동의 안팎을 두루 이끌고 동료들에게 용기와 지혜를 불어넣은 이들이다. 책에는 이들 중에서도 기록을 많이 남긴 10명의 주요 인물(김구 안중근 안창호 윤희순 한용운 신채호 여운형 김마리아 조소앙 박차정)을 선정해 10편 내외의 어록을 수록했다. 어떤 말은 높은 이상과 실천적인 교훈을 담았고, 또 어떤 말들은 한 인간의 감동적인 결단을 노래했다. 정의롭게 살고 말겠다는 의지와 공동체에 대한 진심을 보여주는 이 말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한편의 시를 연상하게 한다. 독자들이 이 말들을 한 단어 한 단어 제대로 음미할 수 있도록 엄주 작가의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특별한 편집과 디자인을 선보인다. 추천의 말을 남긴 역사학자 한홍구의 말대로 “매일 한면씩 필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자양분으로 삼아보길 권한다.

“한 나라 가운데 맥 끊긴 데가 있으면
국민 된 자 자신의 생명은 어찌 온전할 길이 있겠습니까.
나라 사랑은 당연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까.” - 안창호의 말

독립운동가들의 고결한 삶은 언제 접해도 감동과 존경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어록집을 꾸릴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기록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술, 기고, 정견 발표, 연설문 게재가 이뤄진 인물의 경우 자료가 충분지만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조직과 실천에 힘쓰느라 그런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소개한 35명의 독립운동가들은 누구보다 큰 희생정신으로 독립운동을 이끌었지만 이 중 많은 이들의 행적과 발언은 해방 후 주변인의 증언으로만 전해진다. 하지만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기에 짧은 어록을 하나씩 소개하고 행적을 밝혔다.

“미래 세계에서는 한국 민족의 위대함을 보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그 위대함은 그저 나라를 회복하는 데 있지 않고
반드시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다.” - 조소앙의 말

80년이 흐른 오늘, 우리는 한반도를 둘러싼 위태로운 국제정세, 기후위기와 양극화, 민주주의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으로 증명한 정의와 연대, 그리고 책임의 가치를 오늘 우리의 언어로 되새기고 그 정신을 바탕 삼아 민주공화국을 다시 세우는 일이 절실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꿈꾸었던 ‘나라다운 나라’는 단순히 국권만 회복된 곳이 아니라, 모두가 인간다운 존엄을 누리는 사회였으며, 그 꿈은 여전히 오늘의 과제로 남아 있다. 독립운동과 광복이 이미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끊임없이 되새겨야 할 역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롭고 주도적이며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를 회복하고자 희생한 독립운동가들의 말과 생각은 세계로 꽃피워갈 K민주주의의 씨앗이 될 것이다. 선열들이 건넨 ‘희망’과 ‘책임’이라는 두 단어가 오늘 또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일으켜 세운다면,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나라를 회복하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독립의 꿈이 광복으로 귀결되었듯, 오늘의 민주주의도 결국 우리가 어떤 상상력을 품고 어떤 실천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일을 달리할 것이다.

독립운동가 45인

강평국 곽낙원 김구 김규식
김란사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좌진 김창숙 김향화 남자현
동풍신 박은식 박자혜 박차정
방정환 손병희 신규식 신채호
안경신 안중근 안창호 여운형
유관순 윤봉길 윤형숙 윤희순
이봉창 이상설 이원록 이회영
정인보 조마리아 조만식 조소앙
조신성 주세죽 주시경 지청천
차미리사 최용신 최재형 한용운 홍범도




나의 희망이나 소원은 첫째로 대한 독립이요, 둘째로 우리나라의 독립이며, 셋째로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다. 나의 소원은 언제 어느 곳에서나 단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김구)

우리 민족은 과연 어떠한 나라를 세워야 할 것인가?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길 원하지 아니한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기를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경제력은 우리의 생활을 충족할 만하고, 우리의 무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김구)

  작가 소개

지은이 : 김구
본관은 안동(安東). 아명은 창암(昌巖), 본명은 김창수(金昌洙), 개명하여 김구(金龜, 金九),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 후에는 김두래(金斗來)로 고쳤다.호는 백범(白凡). 황해도 해주백운방(白雲坊) 텃골[基洞] 출신. 김순영(淳永)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났다.19세에 팔봉접주(八峰接主)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安泰勳)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重根)과도 함께 지냈다.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高能善)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쓰치다[土田讓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圓宗)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大寶山)영천암(靈泉庵)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靑年會) 총무로 일했다.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楊山學校)를 세웠다.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安明根)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東山坪)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였다.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屠戮抗戰)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이에 중국군 김홍일(金弘壹)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宋式驫)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李奉昌)의거와 4·29윤봉길(尹奉吉)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1933년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같은해 충칭[重慶]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金奎植),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陜西省]시안[西安]과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李奉昌)·백정기(白貞基)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民主議院)·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金枓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목차

독립운동가들의 말을 담으며

김구의 말
안중근의 말
안창호의 말
윤희순의 말
한용운의 말
신채호의 말
여운형의 말
김마리아의 말
조소앙의 말
박차정의 말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의 말

강평국 곽낙원 김규식 김란사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좌진 김창숙 김향화 남자현 동풍신
박은식 박자혜 방정환 손병희 신규식 안경신 유관순 윤봉길 윤형숙 이봉창 이상설 이원록
이회영 정인보 조마리아 조만식 조신성 주세죽 주시경 지청천 차미리사 최용신 최재형 홍범도

  회원리뷰

리뷰쓰기

    이 분야의 신상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