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이름 없는 풀처럼 살아가며, 다정한 시선으로 세상에 안부를 건네는 느림의 시학이자, 존재의 시학이다. 그 안부는 단순한 문안이 아니라, 존재가 존재를 살게 하는 방식이며, 사랑이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문장이다.구본결의 시는 급하지 않다. 그 말들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줄 알며, 가난한 손끝으로 안부를 묻는다. 그 물음은 위로보다 깊고, 축복보다 단단하다. 그것은 존재가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된 위로이며, 사랑의 방식이다.
출판사 리뷰
세상은 빠름을 능력이라 부르고, 명패를 성공이라 말한다. 눈에 띄지 않는 것들은 쉬이 지워지고, 느린 것들은 뒤처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본결 시인은 그 반대편에서 시를 쓴다. 그는 이름 없는 들풀을 닮았다. 그 풀은 누군가의 눈에 들기 위해 서둘러 피어나지도 않고, 세상에 자취를 남기기 위해 스스로를 과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제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고, 바람과 해와 비와 별빛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충만하게 살아간다.
『국화꽃 안부를 묻는다』는 이름 없는 풀처럼 살아가며, 다정한 시선으로 세상에 안부를 건네는 느림의 시학이자, 존재의 시학이다. 그 안부는 단순한 문안이 아니라, 존재가 존재를 살게 하는 방식이며, 사랑이 사랑을 기억하게 하는 문장이다.
구본결의 시는 급하지 않다. 그 말들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줄 알며, 가난한 손끝으로 안부를 묻는다. 그 물음은 위로보다 깊고, 축복보다 단단하다. 그것은 존재가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오래된 위로이며, 사랑의 방식이다.
이 시집에 등장하는 민달팽이와 풀, 열매와 무덤, 나무와 철새, 모두가 이름 없이 살아가며 서로를 살게 한다. 그들은 다만 거기 있을 뿐이지만, 거기 있음이야말로 살아 있는 증거이고, 사랑의 가장 낮은, 그러나 가장 깊은 자리다.
구본결 시집에 등장하는 자연의 존재들은 인간의 속도를 모른다. 그러나 그 느릿함 안에서 타자의 숨소리를 듣고, 바람과 별빛, 빗방울과 잎사귀의 말에 귀 기울인다. 느림은 세상과 화해하는 시간이다. 구본결 시인의 시는 그 화해의 시간을 언어로 건넨다.
민달팽이와 책
누구나
이름을 걸고 살기는 하지
그런데 집 없는 책은 왜 민 책이 아니지
우리에게만 그렇게 부르는 거 차별 대우야
집 못 버린 너희들 비난할 생각 조금도 없지만
자유로부터 말해 보자면 우리가 한 수 위지
굳이 부르려면 집달팽이, 달팽이 이러는 게 맞아
뭐, 너희들이 세상을 짓는 머리 기둥이라고
그 잘난 머리, 기둥 없어도 내 삶은 괜찮아
더듬더듬 더듬거리며 살아도
내 배로 걷고 내 배짱대로 나는 살지
그래도 나 책잡히고 책 당하고
책임질 일 조금도 하지 않지
특별한 이름 없이 홀딱 벗고 살아도
태양이 눈뜨고 나를 보고
대지가 재워주고 먹여 주니
꾀죄죄한 이름 가로세로 걸어 놓고
누구 눈에 들 날만 꽂혀서 기다리는
너희들보다야 무엇으로 보나 내가 낫지
죽는 자의 말씀들 무덤처럼 쌓여 있는 책
집 앞 공터를 지나 배추밭 가는 길로
알 것만 아는 나, 신이 써 놓은 점자책
하루 한 장씩 새겨읽으면서
오늘도 느릿느릿 내 길을 간다
국화꽃 안부를 묻는다
손바닥만 한 내 뒤 뜰
가을꽃들 소박한 잔치 벌였다
분홍이랄까 옥색이랄까
가을을 입고 있는 범꼬리풀꽃
고향 이웃 누나 얼굴 하나둘 깨워 내는 백일홍
고려청자 국화병 문을 열어
하늘에 낮별로 뜨는 취나물꽃
누가 뭐래도 가을의 마음이지
옹기종기 모여선 코스모스
열매 다 내주고 한해 일 끝낸 포도 덩굴
볕 속에 가만히 몸 담그고
콧노래로 노천욕을 즐긴다
십 년 아니 십오 년 조상 벌초도 드물던
구순 되신 둘째 작은아버지
북어 같은 얼굴로 찾아오셔서
너도 이제 늙었구나 늙었구나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다
빈 하늘에 그리운 길 하나 지우고 가셨다
가을은 가을이라고
가슴 속 흐르는 물줄기
이곳저곳 정(情)의 깊이를 재며 흐르다가
머리 흔들고 발길을 돌린다
흰 이슬 서늘한 이 새벽 뒤뜰은
내 살아온 날들의 허물을 씻는 세례장
부디 겉과 속이 하나 되어
비닐 천막처럼 투명한 삶이 되길
마음 한 점에도 욕심의 그늘 들지 않길
뒤뜰 툇마루에 시간을 떼어 놓고
꽃들 사이에 슬며시 끼어 앉아
참이슬 한 잔을 받아 들며
국화꽃 안부를 묻는다
처서
이제, 축제는 모두 끝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가을 철새가 깊어진 하늘길로
날개를 저어 돌아오면 마음이
더 넓어진 호수 가슴을 열어
하늘과 물새를 끌어안고
푸른 물 갈대 붓을 세워
궁서체로 밤새워 손 편지를 쓸 것입니다
달빛은 강물을 따라가며 춤추고
풀벌레 찬 이슬에 어깨가 젖어도
사랑 노래 초원에 출렁이면
갈꽃들 흔들리며 잠들지 못하겠죠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그렇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살은 살끼리 뼈는 뼈끼리
부딪치며 돌아가라 하시고
가슴만 남겨서 가슴끼리 사랑하게 하십시오
오직 사랑이 목숨이고
목숨이 사랑인 사랑만이 존재인 줄
깨닫게 해주십시오
나무는 입을 하나씩 버리고
길이 보이는 모든 창문을 닫아도
가을꽃은 저 언덕과 휘파람을 사랑한다고
가을의 언어로 속삭이겠죠
말해 주십시오
잔치는 열려 취한 꿈 깨어날 일 없고
사랑으로 가는 길은 끝이 없으니
이별은 사랑의 끝이 아니라고
바람이 하나씩 문을 닫고 돌아가는 이 저녁에도
작가 소개
지은이 : 구본결
시인강원도 홍천 거주. 강원대 일반대학원 철학을 전공 수료했으며, 2023년 『시인정신』으로 등단했다.
목차
● 시인의 말
제1부 그 강에 닿았을 때
그 강에 닿았을 때 10
나는 풀입니다 11
명품 가방 14
열매 15
열매와 무덤 16
민달팽이와 책 18
나무 세상엔 화장실이 없다 20
의문 부호 22
방 한 칸 24
황소의 눈 26
비밀의 방 28
아버지 남양군도 30
제2부 모두 받아 안아주는 바다
바다 36
망초꽃 37
사랑이란 38
쌍무덤 40
事월 42
자목련 44
바람꽃 46
달빛 걷기 48
블루베리 50
사량도에서 52
명화 54
장마전선 56
그 여자 58
제3부 나무의 길, 사람의 길
무상 62
감. 11월 63
국화꽃 안부를 묻는다 64
처서 66
나무의 눈물 68
간이 정류장 70
귀로 사는 의자 72
복자기 단풍 74
산골 우체통 76
덧발 78
물걸리 80
절골 82
아내의 저녁 84
낙엽의 길 86
별에 사다리를 거는 밤 88
사과와 장미 90
달의 뒤뜰에 감빛 꿈을 심는다 92
고지전 94
제4부 뭐 하려고 살고 죽는 일은 벌어서
빙어 98
외할머니 99
글 쓰는 나무 102
용대리 먹태 104
할미꽃 106
홀로 가는 길 108
저 남자 110
가을 뒷모습 112
앵강만 풍경 114
▨ 구본결의 시세계 | 송연숙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