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상현이가 오늘도 3교시 중간에 왔다. 학교 바로 옆에 사는 녀석인데. 목소리가 커졌다. 마음이 욱했다는 증거다. 숨 고르기를 했다. “그럼, 니 내하고 역할을 바꿔 보자. 내가 니고 니가 이제 선생이다.” 선생은 상현이 자리로 가고 상현이는 교탁 앞으로 갔다. “선생님, 저 오늘 늦잠 자서 지각했어요. 늦잠을 자도 너무 자서 3교시에 학교 왔어요.” “그래. 다음부터 그러지 마라.” 상현이가 다정하게 타이르는 말에 반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는다. 선생도 웃었다.
‘말’이 가진 힘을 느끼게 한다. ‘교사의 태도’를 생각하게 한다.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 규칙을 들이대거나 올바른 태도를 가르치는 것으로 교사의 역할을 삼을 수도 있으련만, 그런 것으로는 건질 수 있는 게 없다. 망가진 교실은 더 얼어붙고 아이는 제 행동을 돌아보기보다는 경계 태세를 취한다. 나머지 시간을 살릴 기회마저 잃어버린다는 거다.
이런 순간 교사 구자행은 어깨에 힘 빼고 체면 내려놓고 아이 마음을 먼저 살핀다. 아이 감정을 헤아리며 서로를 이해하는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서면 굳은 분위기가 탁 풀린다. 그래서 교실이 험악하게 치닫지 않고 아이 마음도 풀린다. 마음이 풀리고 분위기도 풀린 교실은 즐겁다. 아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어야 하나 고민하는 교사나 어른이 읽으면 좋겠다.
출판사 리뷰
갈수록 선생 노릇 하는 게 힘들다고 한다.
학교가 흔들리고, 학생은 학생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힘들어한다.
더 나은 제도와 정책으로 풀어 가야 할 일도 있겠으나 그것은 그것대로 하더라도, 결국은 사람이 풀고 해결해야 한다. 교육은 제도와 정책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예술이니.
여기 평생 국어 교사로 살아온 사람이 있다.
아이들 마음을 부추겨 이야기판을 벌이는 것을 즐거워하고, 아이들은 제 이야기를 하며 시도 쓰고 자라온 이야기로 성장소설도 쓴다.
도대체 무슨 비결이 있는 걸까?
늘 지각하는 아이, 한여름 풀잎처럼 시든 아이, 특별 상담이 필요한 아이, 여느 교실처럼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다. 그의 교실이라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풀어가는 방법이 다르다.
아이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주고받는 교사의 “말”에 길이 있지 않나 싶다. 예의 없고 버릇없다며 나무라며 끝낼 수도 있고, 어른에 대한 태도를 문제 삼을 수도 있고, 그런 비속어를 쓰면 안 된다며 가르칠 수도 있을 순간에 어깨에 힘 빼고, 어른이라는 체면치레 빼고, 아이들 기분을 존중하며 같은 눈높이에서 말을 주고받아 분위기를 탁 푸는 힘이 있다.
공부 시간에 축 처져 있는 아이들에게 좋은 일 하나만 생각해 보자고 말해도 시큰둥하다. 은근슬쩍 “오늘 내 수업 한 시간 들었잖아” 해 보지만 아이들은 아니라고 고개를 흔든다. 그때 누군가 “오늘 점심에 닭꼬지 나와요” 하자 시든 풀처럼 고개 숙인 아이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든다. 그 순간 선생이 “그래, 그렇구나. 내가 닭꼬지보다 못하구나” 하자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린다. 참 별거 아닌 것 같아도 힘 빼고 툭 던진 교사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을 웃게 만들고 학생과 교사 사이의 벽을 허문다. 공부 시간에 나눠 준 원고지를 몇 번이나 다시 달라고 해도, 교실 청소를 하다 콘돔을 주워도 가르치기보다는 맞장구치며 다가간다. 이렇게 관계가 만들어지면 아이들이 조금씩 자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이혼한 이야기도 털어놓고, 마음에 담았던 여학생에게 전화번호 물었다가 퇴짜맞은 이야기도 하고, 야밤에 아령 운동하다 코피 터진 이야기를 하면서 같이 웃는다.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은 친구들 사정도 알게 되고 서로 위로하기도 한다. 제대로 된 ‘말하기 교육’이다. 말을 하는 건 서로 통하기 위해서인데, 제대로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말이 통하게 되면 ‘글쓰기’는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자고 하면 말에서 글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아이들에게 글을 쓰게 하는 게 얼마나 힘이 드는가. 교사가 들려주는 말이 아니라 아이들이 하는 말에서 시작해 보면 어떨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저자가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건네고, 어떤 상황에서 아이들과 맞장구치는지 잘 보여 준다. 가르쳐야 하는 무거운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글을 읽으며 웃다 보면 나도 모르게 힘을 주고 있던 팽팽하던 마음이 조금은 느슨해질 수도 있으니. 그렇게 힘 빼고 느슨해진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 보자. 그러면 그 틈 사이사이로 아이들이 들어올 수 있지 않을까.
무한긍정남
국어 수행평가로 서평 쓰기를 시켰다.
원고지를 인쇄해서 나눠 주었는데
예진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민다.
“샘, 또 잃어버렸는데 한 장 더 주시면 안 돼요?”
지난 시간에도 한 장 받아갔으니 벌써 석 장째다.
“예진이는 용지를 잃어버렸는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구나.”
나도 웃으면서 받아 주었다.
그랬더니 옆에 앉은 지원이가 감탄사를 날렸다.
“우아! 역시 무한긍정남.”
아무튼 나는 이 신인류를 문제로 보지 않기로 오래전부터 마음먹었다. 애써 바꾸어 보겠다는 마음이 없다. 그저 바라봐 주기로. 내 잣대로 저울질하지 않고 내 틀에 맞추어 판가름하지 않기로. 다만 아주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기는 하다.
“선생님.”
“왜?”
“특별 상담은 언제 해요?”
“벌써 다 했는데.”
“언제요?”
“아까 감 딸 때.”
“예에?”
“그때 감이랑 특별 상담한 거였는데.”
모두 웃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뒤에 앉은 상훈이랑 영민이는 떠들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서로 다리를 베고 누웠다. 옆에 앉은 성찬이랑 이런저런 얘기 하면서 왔다.
“오늘 성찬이 밥 한 그릇 비우는 거 보니 고맙더라.”
“네. 저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점심을 조금씩이라도 먹어 봐.”
“안 넘어가요. 억지로 먹으면 다시 토합니다.”
“그래도 먹어야 힘이 나지. 그렇게 안 먹어서 어쩌나.”
작가 소개
지은이 : 구자행
고등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면서 지내다가, 이제 나이를 다 채우고 2025년 8월에 물러난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 어른 마주하듯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에 오래 몸담으면서 삶을 가꾸는 글쓰기에 힘을 기울였고, 그 열매로 해마다 아이들 글을 모아 글모음을 내고, 아이들이 쓴 글을 엮어 책으로 내기도 하고, 글쓰기를 가르치고 이끄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을 펴내기도 했다.교실에는 마치 다른 별에서 온 듯한 엉뚱한 아이가 더러 있다.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 아이가 늘어가는 듯하다. 곁에서 가만히 지켜보기도 하고, 조심스레 문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잠시라도 이쪽으로 건너와서 함께 놀아 보자고 손을 내밀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쓴 책으로는 《국어 시간에 소설 써 봤니?》 《국어 시간에 시 써 봤니?》가 있고, 엮은 책으로는 《생긴 대로 살아야지》 《찔레꽃》 《꽁당보리밥》 《기절했다 깬 것 같다》 《버림받은 성적표》가 있다.
목차
머리글
1부 신인류
닭꼬지 / 맞장구 / 제 앞가림하기 / 낯간지러운 이야기 / 상현이 / 상우와 현태 / 말높이 /
동심 여행 / 집단 상담 / 신인류
2부 따뜻한 기억
고자행님 / 조자행 선생님 / ‘분배의 공정성’ 자유 토론 / 무엇이 우리 말일까? / 우진이 넉살 / 콘돔 사건 / 특별 상담 / 이제 지리 시간도 싫어질 것 같다 / 따뜻한 기억 / 송곳
3부 제 이야기 풀어내기
시 읽는 교실 / 정수 / 제 이야기 풀어놓기 / 참나무야 대나무야 옻나무야 / 아기 장수 이야기 /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교실 / 한 권 읽기, 첫 시간 / 판에 박은 글쓰기와 맘껏 펼쳐 내는 글쓰기 / 왜 글을 쓰면서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