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동네 시인선 164권. 2009년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던 고영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삶의 페이소스가 짙게 묻어나는 시편들로 독자들과 소통해온 고영 시인의 이 시집은 시대와 세대를 넘어서도 여전히 매력적인 사랑과 슬픔을 담고 있다.
출판사 리뷰
닿을 수 없는, 다할 수 없는
이 시집은 2009년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던 고영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개정판이다. 2003년 《현대시》로 등단한 이후 삶의 페이소스가 짙게 묻어나는 시편들로 독자들과 소통해온 고영 시인의 이 시집은 시대와 세대를 넘어서도 여전히 매력적인 사랑과 슬픔을 담고 있다. “어떤 벼락이든 한번은 맞고 볼 일”이라는 그의 자서처럼 삶의 비의(悲意)를 해학으로 풀어내려는 시인의 의지가 독자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줄 것이다.
어떤 만남은 눈을 멀게 한다. 당신을 떠올리고 다시금 당신만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밤이 있다. 또한 모든 길이 당신에게 향하는 것만 같거나 혹은 당신에게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처럼 보이는 순간도 있다. 어떤 사랑은 맹목을 낳는다. 서시 「고라니」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지뢰밭을 지나는 ‘고라니’는 그러한 맹목의 자세를 그리는 상징이 된다. 더 나아가 “문득, 몹쓸 짓처럼 사람이 그리워졌다”라는 진술처럼 한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언제나 몸에 달고 살던 위험이여”라는 진술처럼 위험을 무릅쓰는 순간을 훈장으로 여기는 당당한 자세로 이행해간다. 당신을 향한다는 것, 그것은 당신 이외의 모든 존재와 장소가 거추장스러운 올가미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뜻한다. 당신에게 닿는다는 것, 그것은 그 순간을 향해 나아가는 동안 겪는 모든 시련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 시집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의 의미는 당신에게 닿을 수 없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그대에게 못다 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원고지의 힘」)라고 되뇌거나 “너에게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자화상」)라고 말할 때, 이렇듯 홀로 회상하다가 문득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외로움을 느낄 때 이 마음들은 스스로 자임한 원칙이나 사회적 죄의식 때문에 발생하는 수치심이나 고독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이 감정들은 당신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이다. 어쩌면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수천 마리 피라미 떼가/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원고지의 힘」)라는 고백조차 오직 당신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너……라는 말 속에는 죽음도 두렵지 않은 불멸의 그리움도 살고”(「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있다는 진술처럼, 그리움이 ‘너’로 인해서 탄생하듯 이 시집은 ‘너’로 인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폭낭 그늘에 초가 한 채 짓고
그대와 단둘이 누웠으면 좋겠네
남들이야 눈꼴이 시든 말든
하르방 몸뚱어리가 달아오르든 말든
그대와 오롯이
배꼽이나 들여다보면서
- 「폭낭」 부분
고개를 쳐들고
들어가야 하는 집 앞에서
자꾸 목이 꺾인다.
무슨 낯짝으로,
무슨 염치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내가 들어가
폐만 끼치는 집
상처만 되는 집
차라리 대가리를 버린다.
뱀처럼 휘어져
흘러든다.
- 「못」 전문
반복되는 공간 상징인 ‘집’은 실은 상이한 두 가지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폭낭」은 만사를 잊고 당신과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그리는 시편이다. 세상 따위는 잊고 당신과 함께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폭낭 아래의 “초가 한 채”는 시인이 소망하는 낭만적 사랑의 풍경을 잘 보여준다. 한편 차마 되돌아가기 부끄러운 ‘집’도 있다. 「못」에서 줄곧 상기되는 부끄러움은 폐만 끼치고 상처만 입히는 관계에 대한 반성의식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제목처럼 ‘나’가 그들에게 상처 입히는 ‘못’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는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차라리 대가리를 버린다”라고 자조(自照)하고 있다.
따라서 외딴 사랑의 풍경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집’이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이 대조 안에서 ‘당신’을 향하는 ‘집’이 굴레가 되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황야의 건달」에서 ‘집’은 장모와 아내와 자식들 모두가 아빠인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쓸쓸한 거처를 의미한다. 그러한 거처를 “어쩌다가, 어쩌다가 몇 달에 한 번꼴로 들어가는 집. 대문이 높다.”라고 표현할 때 높은 대문은 벽이나 다름없다. 어쩌면 낭만적 사랑은 그러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로서 상상되는지도 모른다. “담장 위에도, 지붕 위에도, 전봇대 위에도/생문(生門)은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그에게/허공에 집 짓는 일을 시켰다”「(평발」)라고 진술할 때, 그는 허공에 집을 짓는 거미의 운명으로부터 자신의 운명을 연역해내는 것은 아닐까. 그가 낭만적 사랑의 풍경을 꿈꾸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보, 너도 집 잃어버렸지?”「(이사」)라는 반문처럼 그에게 지상의 현실은 거주할 곳 없는 황야인 셈이다.
- 박동억(문학평론가)
마음이 술렁거리는 밤이었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문득, 몹쓸 짓처럼 사람이 그리워졌다
모가지 길게 빼고
설레발로 산을 내려간다
도처에 깔린 달빛 망사를 피해
오감만으로 지뢰밭 지난다
내 몸이지만 내 몸이 아닌 네 개의 발이여
방심하지 마라
눈앞에 있는 올가미가
눈 밖에 있는 올가미를 깨운다
먼 하늘 위에서 숨통을 조여 오는
그믐달 눈꼴
언제나 몸에 달고 살던 위험이여
누군가 분명 지척에 있다
문득 몹쓸 짓처럼 한 사람이 그리워졌다
수수깡이 울고 있었다
― 「고라니」 전문
원고지를 놓고 막상 책상에 앉고 보니
무엇을 쓸 것인가
그대에게 못다 한 진정의 편지를 쓸까
하늘에게 사죄의 말씀을 쓸까
달리의 늘어진 시간에게 안부나 물을까
막상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밤
지난여름 내게만 사납게 들이치던 장대비가
원고지 칸과 칸 사이를 적시고
목적지도 없는 폭풍의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가 끌고 가는 기—인 강물 위
빠져 죽어도 좋을 만큼 깊고 푸른 달이 반짝
말라비틀어져 비로소 더욱 눈부신
은사시나무 잎이 떨어진다
지난 과오가 떠오르지 않아 얼굴 붉히는 밤
수천 마리 피라미 떼가
송곳처럼 머릿속을 쑤신다
눈에 보이지 않아 더 그리운 것들
원고지를 앞에 놓고 보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그 전부가 그립다
― 「원고지의 힘」 전문
날개가 불이라서 뜨겁니?
아님 네 한 몸 다 불살라야 닿을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나라가 있니?
기어이
처음 그날처럼 기어이
홑겹의 날개 위에
평생 지울 수 없는 문신을 새기며
상처에 불을 밝히며
저 텅 빈
날갯짓으로 날아가는
너는
누구의 영혼이니?
― 「반딧불이」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고영
1966년 경기 안양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2003년 《현대시》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으로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너라는 벼락을 맞았다』 『딸꾹질의 사이학』, 감성 시 에세이 『분명 내 것이었으나 내 것이 아니었던』 등이 있다. 〈고양행주문학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천상병시문학상〉을 수상했다. 2019년 현재 월간 《시인동네》 발행인 겸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
목차
제1부
고라니13/원고지의 힘14/자화상16/사랑17/아무도 오지 않는 오후18/너……라는 벼락을 맞았다20/개꿈21/물끄러미 칸나꽃22/달 속에 달이 기울 때24/칡 캐러 간다26/파경27/폭낭28/배꼽이 명함이다30/반딧불이32
제2부
못35/삼겹살에 대한 명상36/황야의 건달38/화살40/그림자41/평발42/이사44/천사보육원46/이미지47/떠들썩한 슬픔48/돼지의 무기50/건달의 슬픔52/고욤나무집 사내들54/상처56
제3부
킥킥, 유채꽃59/햇발국수나 말아볼까60/눈물은 힘이 세다62/큰곰자리별 어머니64/벅수야! 벅수야!66/음복(飮福)68/인절미69/망령 난 봄날70/코스모스72/목련여관 304호74/꽃들은 입을 다문다75/추석 전야76/아버지의 안전벨트78/확인80
제4부
마제잠두83/은자(隱者)84/북청전당포86/개구리88/구름의 종점89/슬픈 호사(豪奢)90/칼날 잎사귀92/속죄94/팔랑팔랑95/함부로 그늘을 엿보다96/오직 한 갈래98/토종닭집 감나무99/바람의 꽁무니를 따라 걷다100/눈사람의 귀환102
해설 박동억(문학평론가)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