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시인동네 시인선 147권. 2001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박순호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말(언어)이 탐구하는 세계란 본질적으로 불완전성을 포함하고 있을 터인데 그러한 측면에서 박순호의 시적 불안은 경험적인 동시에 언어의 불안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박순호 시인에게 시란 이 상처와 부조리를 넘어서려는 방어적 기제이면서 동시에 끝내 따라잡을 수 없는 실체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찰과 애도는 자신의 전 생애를 조율하는 사유의 방식이다.
출판사 리뷰
주석이 필요 없는 우울과 편집적 시 쓰기
2001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박순호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너의 은유가 나를 집어삼킬 때』가 시인동네 시인선 147로 출간되었다. 말(언어)이 탐구하는 세계란 본질적으로 불완전성을 포함하고 있을 터인데 그러한 측면에서 박순호의 시적 불안은 경험적인 동시에 언어의 불안이라는 측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박순호 시인에게 시란 이 상처와 부조리를 넘어서려는 방어적 기제이면서 동시에 끝내 따라잡을 수 없는 실체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성찰과 애도는 자신의 전 생애를 조율하는 사유의 방식이다.
■ 해설 엿보기
박순호 시인의 이번 시집은 다분히 철학적인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그것은 충분히 의도된 시적 지향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시란 감정의 유로라고 했던 낭만주의 시관과는 상당한 거리를 가지며 어떤 점에서는 보다 현대적인 의미의 시적 구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의 가장 큰 특징은 문장에 있다. 각각의 문장은 마치 서로 관계가 없는 듯 떨어져 있지만, 그것들은 묘한 소통의 창구를 통해 통일적 의미망을 형성하며 긴 호흡으로 몰아간다. 가령 “설명은 무의미한 공간에 배치되어 움직이지 않는다/어떤 책 가장자리에 적힌 필체를 따라 나의 생각을 밀어 옮긴다/집필이 끝난 방에는 철 지난 옷가지들이 창밖을 염탐한다”(「망루」)와 같은 각각의 문장은 의미상으로 완전히 절연된 듯 보인다. 이 절연의 양상이 시 전체 속에서 어떻게 서로 스며 유의미성을 회복하는가 하는 문제는 감각의 문제이며 나아가 시 정신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비밀을 따라가는 길이 박순호의 시를 읽는 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죽은 자로부터 받은 심장을 진리의 저울에 올려 가늠하는 아누비스
고통의 해방을 외치며 팔딱거리는 산 자의 심장
앞에서 나는 중얼거린다
말하지 못했던 진실은 진리에 가깝다
나는 공공연한 비밀을 꺼내 저울에 달아본다
- 「공공연한 비밀」 전문
시집 가장 앞에 놓인 이 비장한 한 편의 시는 시에 대한 시인의 윤리적 감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죽음의 심판이란 곧 삶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절체절명의 상황 앞에서 “말하지 못했던 진실은 진리에 가깝다”는 중얼거림은 실존의 자기 고백인 동시에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공공연한 비밀”이란 “말하지 못했던 진실”일 터이며,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이란 바로 그 진실을 향한 육박을 뜻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 시적 고백은 성찰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는 건 늘 낡고 서먹서먹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나를 파헤쳤다가 다시 묻어버”(「다큐멘터리」)린다는 표현도 시적 주체의 진실을 향한 육박과 그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의 윤리적 감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공공연한 비밀” 혹은 “진실”을 “저울에 달아본다”는 담담한 고백은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시 쓰기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 우대식(시인)
햇빛이 펄럭거린다
타락한 웃음, 검은 어깻죽지에도
불의 혀가 핥고 간 흰 재 위에도
말을 꺼내지 못하는 과묵한 표정 앞으로
두 팔을 펼치는 찬란
쳐내고 쳐내도 거친 표현이 웃자란다
나는 몸을 낮추고
깨지기 쉬운 가장자리부터
약속되어 있지 않는 모든 것
고여 있는 침묵을 움켜쥐지만
어딘가에는 차가운 성질이 숨어 있고
막상 내가 꺼내놓은 물건들마다 싸구려 냄새가 진동한다
쓸쓸하기 짝이 없는 건방진 말투
필요 이상의 호기심
애초부터 싹수가 노란 아이들은 그늘을 늘려갔고
즉흥적인 기분은 대부분 찢겨져 파기된다
안개를 들춰내고
푸른 줄기를 꽂아놓는다면 서정이 되는가
그렇다면 바싹 마른 잎을 조금 더 붙잡아둘 수 있을까
때로 웃음만으론 해결되지 않는 일들
문서로 꾸며진 일련의 협박들
타지로 돈 벌러 나간 사이
빈집에 택배와 우편물을 들이듯
서정은 주인 없이도 활발하지만 가끔 무례하다
나는 필요 이상의 걱정을 안고 사는 편이다
숨죽이는 울음을 손질하길 좋아한다
― 「필요 이상의 호기심」 전문
정면에서 마주치거나 마주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정면은 기억을 캐내고
들키기 쉬운 겨울 숲
나는 시시때때로 생각이 변하고
선잠을 청하곤 한다
새로운 배열은 부화되지 않는 알처럼 천진난만하고 살구색을 띤다
몸은 앞질러 가는 걸 좋아한다
차오르는 숨에서 연민이 묻어난다
때로 불쾌한 온도는 응고되는 시간을 늦춘다
나는 선잠에서 깨어나
얼핏 노인이 된 나를 들여다본다
감기 기운이 풀죽어 있다가도 창가에 서면 빳빳해진다
당신의 기억은 식감 좋은 채소처럼 아삭하고
공유할 수 없는 저 너머의 느낌을 잡아둔다
다림질한 바지는 무릎을 따라 길의 무늬가 결정되고
잠을 쫓아내며 식속들을 책임진다
수녀가 성경이 든 가방을 지하철에 두고 내린다
― 「감정피로」 전문
옥수수밭 위에 구름이 집을 짓고 쪽문을 낸다
옥수수밭 사잇길
바이올린 든 낡은 가죽가방을 맨 사람을 만났고
무너진 구름더미 아래서
연주를 청했다
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꺼낸 거 같아
머쓱해 했지만
그는 차분히 가방을 열고 연주를 시작했다
옥수수 알갱이는 빈자리를 찾아 들어차고
구름의 움직임은 굼뜨고
벌레들이 잎사귀를 갉아먹다가 잠시 멈췄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마치 정원에 날아든 주름꽃이 어울리는 것처럼
작은 것들을 위한 열정
처음 접했던 앳된 정서들
하지만 모든 날은 기록되길 원치 않는다
바이올린을 켜던 사람은 떠나고 없다
바람이 한 차례 옥수수밭을 훑고 지날 때
길쭉한 초록 잎들은 허공의 어깨에 대고 활을 문지른다
추수 때가 가까워 온 옥수수밭 사잇길을 걷는다
― 「옥수수밭 사잇길」 전문
작가 소개
지은이 : 박순호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2001년 《문학마을》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다시 신발끈을 묶고 싶다』 『무전을 받다』 『헛된 슬픔』 『승부사』가 있다.
목차
제1부
공공연한 비밀 13
다큐멘터리 14
필요 이상의 호기심 16
과장된 소문 18
우리는 서로에게 낱장으로 기억되고 20
안쪽에서의 파동 22
쓸데없는 걱정 24
완벽해서 너무도 완전해서 26
문장과 문양 사이 28
감정피로 30
무소부재 32
그 계절 34
기억 속에서 움트는 생각들 36
환멸에게 보내는 쪽지 38
제2부
열무국수 41
옥수수밭 사잇길 42
치자 물을 들이면서 44
광대뼈 46
문 48
아이스크림 공장 50
파도가 온다 53
오늘 마주한 것들 54
근원 56
파산 58
전설 60
망루 62
파생된 기억 64
점자의 밤 66
제3부
스노우볼 69
기이한 전개 70
선천적 우울 72
이식 74
내력 76
애도하는 삶 78
강박증 1 80
강박증 2 81
암묵적인 나날들 82
손 스침 84
오수리 시편 1 86
오수리 시편 2 88
노루발못뽑이 90
크로키 92
제4부
불후의 명작 95
너무 뜨겁고 너무나도 요란하다 96
예상 밖의 일 98
구멍 100
만에 하나 102
부패한다는 것 104
신경쇠약 106
카페 바그다드 108
저녁의 이마 110
각주를 달다 112
매 순간 114
검은 숲 116
해설
우대식(시인) 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