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아누비스’는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죽음의 신으로,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의 몸에 검은 늑대의 머리를 하고 있다. 초기 신화에서 죽음 전반을 관장하던 아누비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제작할 때 장례 감독을 하거나 저승에서 망자를 맞이해 심장의 무게를 재는 등 실무자로 자리 잡게 된다. 죽음은 보편적이지만 개인이 맞는 죽음은 개별적 경험이다.
폴란드 작가 요안나 카르포비치의 화집 『아누비스 : 얇은 장소들』은 죽은 이집트인들을 안내하던 신을 카페와 식당, 극장, 세탁소 같은 평범한 일상의 장소로 불러온다. 호텔 프런트 뒤에 서 있거나 생선 가게나 과일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아누비스는 다음 순간 텅 빈 식당에 앉아 있고, 야외 유원지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꽃다발을 구입한다. 그는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제공받는 사람이며, 소비자이기도 하고 산책자이기도 하다.
극장과 전시회장에 가고 세탁소에서 빨래가 끝나길 기다리는 아누비스는 대도시에 사는 익명의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다. 그러나 검은 늑대의 머리를 갖고 있는 한 아무리 숨으려 해도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아누비스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 있을 때도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높이 솟은 두 귀는 불길하게 흐린 하늘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출판사 리뷰
평범한 일상의 공간에 내려온 죽음의 신 ‘아누비스’외로운 우리를 이끌어줄 다정하고 섬뜩한 안내자 ‘아누비스’는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죽음의 신으로, 직립보행을 하는 인간의 몸에 검은 늑대의 머리를 하고 있다. 초기 신화에서 죽음 전반을 관장하던 아누비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제작할 때 장례 감독을 하거나 저승에서 망자를 맞이해 심장의 무게를 재는 등 실무자로 자리 잡게 된다. 죽음은 보편적이지만 개인이 맞는 죽음은 개별적 경험이다. 죽음 자체가 캄캄한 미지의 영역에 있다 보니 내세의 삶을 준비하는 일은 중대하고도 혼란스러운 일일 수밖에. 그래서 사후세계로 향하는 망자에게는 다정히 이끌어주는 누군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애초에 무덤 주위를 서성거리던 늑대가 죽음을 지키는 자의 얼굴이 된 것은 죽음에 깃든 공포와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죽음은 여전히 삶에 잠재되어 있되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그 근본적인 속성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폴란드 작가 요안나 카르포비치의 화집 『아누비스 : 얇은 장소들』은 죽은 이집트인들을 안내하던 신을 카페와 식당, 극장, 세탁소 같은 평범한 일상의 장소로 불러온다. 호텔 프런트 뒤에 서 있거나 생선 가게나 과일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는 아누비스는 다음 순간 텅 빈 식당에 앉아 있고, 야외 유원지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꽃다발을 구입한다. 그는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제공받는 사람이며, 소비자이기도 하고 산책자이기도 하다. 극장과 전시회장에 가고 세탁소에서 빨래가 끝나길 기다리는 아누비스는 대도시에 사는 익명의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다. 그러나 검은 늑대의 머리를 갖고 있는 한 아무리 숨으려 해도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아누비스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에 있을 때도 낯설고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며 높이 솟은 두 귀는 불길하게 흐린 하늘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다.
필연적으로 아누비스는 외롭고 쓸쓸한 존재다. 그는 대체로 인적 없는 장소에 혼자 있고, 일행이 있을 때도 고독한 분위기는 누그러지는 법이 없다. 소녀들과 둥글게 손을 잡고 춤을 추거나 한밤의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길 때도 예외가 아니다. 아누비스의 검고 무뚝뚝한 얼굴은 인구 밀도가 높고 번잡한 도시에서 외로움에 시달리는 우리와 닮아 있으나 우리가 껄끄러워하는 누군가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발문에서 저자는 카르포비치의 연작 〈아누비스가 있는 그림〉을 올리비아 랭의 책 『외로운 도시』와 연결 지어 외로움이 현대 예술의 주요 소재라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아누비스 연작에서 도시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를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은데 카르포비치의 작업은 선배 예술가들이 포착해낸 대도시의 외로움을 한층 깊고 오묘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이 책이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휩쓸던 2020년에 출판되었다는 사정도 특기할 만하다. 실제로 아누비스 시리즈는 코로나 팬데믹 시기 인스타그램에서 널리 알려졌는데 ‘격리 감성quarantine mood’이라는 캡션과 함께 공유되곤 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도시에서 공허하고 쓸쓸하다고 느끼는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아누비스일까, 아니면 우리일까.
삶의 곁에 내내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를 통해우리를 날카롭게 찌르고 고요히 사색하게 하는 예술이번에 한국에서 출판되는 『아누비스 : 얇은 장소들』은 카르포비치의 아누비스 연작 세 권을 추려 한 권으로 묶어냈다.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그림들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배치하기 위해 일찍이 한국 독자들에게 카르포비치를 소개해온 무루 작가와 협업하였다. 무루는 한국어판 해설 「경계의 존재 아누비스 : 내 그림자 속에서 나란히 걷는 미지의 얼굴」에서 고대 이집트 죽음의 신이 어떻게 현대 일상의 공간 속으로 들어왔는지 분석하며, 죽음이 “불의의 재난이 아니라 삶의 곁에 내내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라는 사실을 짚어낸다. 죽음이 삶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동행 중이라는 사실은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을 설명해줄 핵심 요소일 것이다.
표지 그림 〈뉴저지의 세탁소〉에는 인적 없는 한낮의 거리에 앉아 세탁이 끝나길 기다리는 아누비스가 등장한다. 카르포비치는 오후의 눈부신 빛 속에다 고대 이집트의 상징 ‘앙크Ankh’를 숨겨두었는데 앙크는 아누비스가 망자의 손을 잡고 내세로 인도할 때 들고 있던 머리가 둥근 십자가이다. 영생을 약속하는 앙크가 환한 빛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은 죽음과 외로움이 함께하는 우리의 삶에 가느다랗게 내려오는 계시 같은 것이다. 홀로 지하철역에 서 있거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때 적막한 고독에 휩싸여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다릴 법한 계시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계시는 홀로 존재하는 아누비스가 아니라 그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를 향한다.
부제로 쓰인 ‘얇은 장소Thin Place’란 켈트인들의 용어로 세계의 경계가 얇아지는 장소를 의미하는데 일상의 세계로 틈입해 들어온 아누비스를 표현하기에 더없이 적절하다. 불안이든 우울이든 현대인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은 쉽사리 떨쳐지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안전하게 동행할 필요가 있다. 아누비스의 검은 늑대 머리는 섬하면서도 매혹적이어서 카르포비치의 그림을 볼 때 첫눈에 느껴지는 낯설고 이질적인 느낌은 적극적인 감상과 해석을 요구한다. 『아누비스 : 얇은 장소들』은 예술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날카롭게 찌르고 퍼뜩 놀라게 하고 이윽고 고요하게 생각에 잠기게 하는지 잘 보여준다. 그림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거기에 담겨 있는 이야기를 상상해 보는 것도 이 근사한 화집을 깊이 읽는 방법일 것이다.

아누비스는 때로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명암의 연출에 따라 위협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연작의 핵심인 관음적 시선은 우리에게 ‘관찰하는 자와 관찰당하는 자 중 누구를 자신과 동일시할 것인지’라는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팬데믹 이전이었다면 이 그림들은 우리에게 다르게 질문했을까?
외로움을 암시하기 위해 빛에 의존하는 카르포비치의 방식에서 나는 묘한 위안을 받는다. 랭은 우리가 외로움을 자꾸만 ‘해결해야 할 문제’로 간주한다고 지적하지만, 카르포비치의 그림 속에서 고독은 인간의 고유한 결함도, 피할 수 없는 선고도 아니다. 아누비스가 얼마나 더 기다려줄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이 풍경들을 정지된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상태라고 믿어볼 만하다. 우리는 지금 간절한 기다림의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고, 이 그림들은 그저 멈춰 서서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우리의 막막함에 말을 건다. 기다리는 일은 지켜보는 일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카르포비치의 작품에 스며 있는 기묘한 관음적 시선을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지금 그의 작품에 깊이 매료되는 이유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요안나 카르포비치
화가이자 만화가이며 일러스트레이터. 얀 마테이코 미술 아카데미 회화과를 졸업했으며 2001년 레셰크 미시아크의 스튜디오에서 학위를 받았다. 현재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W www.joannakarpowicz.plIG @joannakarpowic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