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그리움은 허공을 껴안는 것
이별은 눈 맞춤
사랑은…… 햇빛무늬
2023 세계일보 신춘문예 등단 하가람 첫 장편소설
“투명한 그림자가 기어이 피부가 되고 무늬가 되는
이 자유로운 소설이 좋다.”_정용준(소설가)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수박〉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하가람의 첫 장편소설이 은행나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한국문학의 최전선을 감각해온 눈 밝은 독자라면 ‘하가람’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단편 〈재와 그들의 밤〉 〈5월은 창가의 호랑이〉로 2023년·2025년 ‘이 계절의 소설’에 연달아 선정된 그는, 등단 이후 밀도 높은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하며 평단과 독자의 촉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1990년대생 젊은 작가다. 《햇빛무늬동물들》은 격월간 《Axt》에 1년 동안 연재한 작품으로, 촘촘한 얼개와 섬세한 미시적 묘사, 시적인 문장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이야기의 무대는 근미래 가상의 소도시 무로(無路). ‘연오’는 이모 ‘영선’의 집에서 지내고 있다. 사촌 언니 ‘세오’는 연오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아낌없는 사랑을 주지만, 연오는 성인이 되면 이 집을 떠나야 할 거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이모 영선은 어느 날 ‘햇빛무늬증후군’을 진단받는다. 피부에 호랑이 줄무늬 같은 무늬가 생기고 햇볕을 장시간 쬐면 가려움증을 느끼는 이 질환은, 사람의 신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심연으로 침잠시킨다. 영선은 우울감을 떨쳐내고자 하숙집 ‘세오하우스’를 열어 타인을 환대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일견 어딘가에 속하지 못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따듯한 집이 되어준다. 한편 외로움을 그림자처럼 끌고 다니던 연오는 우연히 길에 쓰러진 한 아이를 발견하고 ‘웅’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웅은 멸종위기동물원에서 자란 마지막 호랑이로, 깊은 상처와 비밀을 품은 채 인간 아이의 형상으로 변모한 이종(異種)의 존재다. 상실이라는 공통의 문법을 공유한 연오와 웅은 한 계절을 함께 통과하며 서로가 속한 세계의 지평을 서서히 통합해나간다. 연오에게 웅은, 생애 첫 우정임과 동시에 첫사랑이라는 존재론적 사건이 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닮은 존재’를 갈구한다. 침묵 속에서도 상호 간의 이해가 작동하는 존재, 그리하여 마침내 나의 등을 온전히 기댈 수 있는 존재를. 폐허가 된 각자의 세계 속에 고립되어 있던 두 친구가 서로를 식별한 순간은 필연에 가까워 보인다. 사랑과 슬픔, 오해와 믿음을 가로지르는 이 아름답고 시적인 성장 서사는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닮아가고 싶은 마음’은 결국 사랑이라는 본질로 수렴된다고. 한 시절의 양분이 된 그 사랑이 우리를 한 뼘 더 성장하게 한다고 말이다.
처음부터 알아봤다.
나와 같은 외로움, 슬픔, 상실감을 가진 웅을.
하지만 모든 게 내 오해였던 걸까?웅은 무로군 항구에서 배를 타고 네 시간을 달리면 도착하는 키키섬의 멸종위기동물원 키키주에서 자랐다. 매일이 평화롭고 안온했지만 혼자라 조금 외롭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육지에서 포획된 다른 호랑이 ‘렁’이 웅이 지내고 있는 구역에 합사가 된다. 더 넓은 세상에서 살던 렁은 웅에게 매일 밤 이야기를 들려주고, 렁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웅의 세상은 한 뼘씩 넓어진다. 하지만 웅과 달리 렁은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야생의 호랑이. 동물원 생활이 지속되자 렁은 답답함과 외로움에 점점 수척해진다. ‘너는 이곳이 답답하지 않아?’ 웅은 처음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이 세계의 전부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웅은 음식까지 거부하는 렁을 보며 친구를 잃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렁과 함께 탈출을 감행하지만, 인간들이 쏜 총에 맞은 렁은 죽음을 맞는다.
“웅은 렁이 온 것이 좋았다. 렁이 오기 전 웅의 밤은 늘 혼자였다. 같은 야행성인 붉은 여우나 수리부엉이는 2급 구역에 있는 탓에 울음소리가 닿지 않았다. 웅은 고요히 제 앞발을 핥거나 유리벽 앞을 서성이는 밤을 반복해왔다. 그러니 렁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 날, 처음 자신과 같은 종을 마주한 날, 철사에 가죽을 덧댄 박제본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진짜 호랑이를 만난 날, 그 호랑이와 함께 음식을 먹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게 된 그날, 웅의 가슴은 얼마나 뛰었을까?”(42쪽)
한편 연오는 우연히 길에 쓰러져 있는 또래 아이를 발견한다. 몸에 호랑이 줄무늬 같은 옅은 무늬가 새겨진 아이였다. 웅이 호랑이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연오는 아이를 이방인의 집, ‘세오하우스’로 데려온다. 세오하우스에는 혼자가 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다. 따로 또 같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함께 따듯한 밥을 나눠 먹고 하루의 일상을 나눈다. 큰 상실을 겪은 뒤에 만난 둘은 같은 슬픔의 냄새를 감지한다.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보기라도 한 듯 조금씩 소통을 시작한다. 늘 혼자라고 생각해온 연오는 웅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 보이고, 웅의 비밀을 일찍이 눈치챘음에도 함구를 택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언어와 배경을 가진 존재가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벽 앞에서 연오는 조금씩 혼란을 느낀다. 어쩌면 내가 너를 오해하고 있던 걸까? 우리의 마음은 양방이 아니라 일방이었던 걸까?
“나도 모르게 소리 내었다. 지나가는 누군가 들었다면 말이 아니라고, 그저 작은 웅얼거림이라고 여겼을 터였다. 하지만 웅은 뒤돌아보았다. 회색 눈동자가 나를 보았다. 투명한 햇살 아래서 전에 볼 수 없었던 푸른 기가 비쳤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번져나가는 문장이 있었다.
너는 호랑이.
사랑은 햇빛무늬.”(100~101쪽)
빛이 무늬를 남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림자가 필요하다는 것
우리가 서로를 발견했던,
청명하고 시린 여름의 이야기책의 제목이기도 한 ‘햇빛무늬’는 이야기 안에서 소외와 고독의 존재론적 인장으로 작동한다. 햇빛무늬증후군을 앓는 이들에게 피부 위에 새겨진 무늬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표식이라면, 인간의 형상을 한 호랑이에게는 그럼에도 타자와 완전히 섞일 수 없는 이종(異種)의 한계를 일깨우는 상징이다. 하가람은 이 모든 ‘다름’의 궤적을 그려내는 과정에서 현실과 비현실, 동화와 설화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알레고리화한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사 그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게 만드는 동시에, 연오와 웅, 영선과 세오, 그리고 사가르의 관계를 통해 고독이라는 실존적 무게를 견디는 이들의 연대가 얼마나 애틋하고 눈부신 것인지 절실히 깨닫게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타자를 온전히 환대하는 ‘진짜 사랑’의 윤리가 무엇인지까지도.
“따듯해진 주스병을 들고 말없이 걸었다. 한참 뒤 웅이 입을 열었다. 신기해.
우리가 방금 대화를 나눴어.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웅과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우리가 같은 언어로 말을 주고받은 것은.”(145쪽)

“나는 화면 안에 들어가고 싶었다. 들어가서 금동이를 만나고 싶었다. 금동이의 푸른 회색 눈동자를 마주하고 큰 빗으로 노란 털을 빗겨주고 싶었다. 많은 이들이 금동이를 귀여워했지만 나는 그 호랑이가 귀엽지 않았다. 사랑스럽지도 않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 호랑이가 나와 무척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날 이후 매일 병에 손을 넣어 젤리를 꺼내 먹었다. 빨간 곰. 노란 곰. 초록 곰. 번갈아가며 한 마리씩. 종종 영선에게 꾸중을 듣는 날이면 한 번에 세 마리를 집어 먹기도 했다. 나는 아저씨에게 젤리를 받았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영선은 물론이고 언니에게도 숨겼다. 그 병은 내가 가족이 아닌 바깥사람에게 받은 최초의 선물이었다. 혼자서 소유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