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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2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 개정증보판
인물과사상사 | 부모님 | 2026.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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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소개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 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출판사 리뷰

지난 10년 한국의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그 모든 것은 어떻게 달려왔는가?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키다”


우리가 살아왔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현대사는 역사의 출발점이자 결승점이다. 끊임없는 선택 속에 지금 내가 살아가야 하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대사는 역사학계에서 찬밥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민감한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논란이 되는 부분은 다양한 입장을 소개하면서도 그 나름의 시각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다양한 참여의 마당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독보적이다. 지금의 ‘나’를 이룬,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보물창고’와 같다.
1945년 8월 15일 정오부터 봉준호의 <기생충>까지 75년의 역사를 촘촘히 담아낸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정치·경제·사회는 물론 대중문화·스포츠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고 있다. 그리고 현대 한국인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삶과 역사의 무대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를 위해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방대한 주석에 당시의 현장을 포착한 사진, ‘역사 산책’ 코너 등을 통해 입체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恨)과 욕망의 폭발’(1940년대), ‘극단의 시대’(1950년대), ‘기회주의 공화국의 탄생’(1960년대), ‘수출의 국가 종교화’(1970년대),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1980년대), ‘분열은 우리의 운명, 연대는 나의 운명’(1990년대), ‘노무현 시대의 명암’(2000년대), ‘증오와 혐오의 시대’(2010년대) 등 각 시대를 지배했던 정서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 속에서 수많은 사건과 주제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진보’의 이름으로 새로운 가치를 선점할 수 있듯이 극단과 궁핍의 시대를 살아남아야 했던 과거 세대의 ‘아픔’도 함께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가 ‘인간’을 배제했던 역사라고 간파하며 ‘인간’의 복원,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이념과 세대의 새로운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는 한국 현대사의 기록과 평가의 문화를 정착시킨 한국 최초의 단행본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 1960년대편 개정증보판 출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10년간을 꼽으라면 1970년대라고 할 것이다. 1970년대를 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가 될 것이다. 1970년 7월 7일에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들고일어난 ‘한강의 기적’을 상징하며, 1970년 11월 13일에 일어난 전태일의 분신자살은 ‘한강의 기적’의 이면에 숨은 잔인한 인권유린을 상징한다. 그 두 얼굴 가운데 ‘전태일’에 주목한다면 1970년대를 부정적으로 볼 것이고, ‘경부고속도로’에 주목한다면 1970년대를 긍정적으로 볼 것이다. 전태일이 분신자살로 항거한 참혹한 노동 실태의 현장이었던 서울 평화시장은 “공간적으로 당시 민중들의 삶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희생 속에서 자본가 계급의 형성을 뒷받침한 요람”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그러한 ‘요람’에서 짜낸 피와 땀을 근거로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경부고속도로가 낳고 촉진시킨 발전과 번영의 수혜는 다른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전태일은 독재권력의 주구로 전락한 언론, 경제발전 지상주의라고 하는 거센 물결 속에서 ‘경제동물화’되어 갔던 중산층과 중산층에 편입되기를 열망했던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까지 보여주었다. 경부고속도로의 중단 없이 쭉 뻗은 길은 발전과 번영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경부고속도로가 하나였던 것을 가로지르면서 만들어낸 경계는 새로운 갈등과 차별을 잉태시켰다. 농촌과 지방 인구는 그 길에 흡수되어 서울과 도시에 내던져졌고, 권력과 부(富)의 집중과 전횡을 낳는 시스템이 고속도로처럼 빠른 속도로 구축되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이 그것을 웅변해주었고 이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1970년대 내내 계속된 그런 ‘억압과 착취’의 시스템을 상징적으로 폭로했다. 박정희의 독재정권이 한국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악영향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단절시킨 것이다. 나와 내 가족을 사회에서 단절시키지 않으면 안전하게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피한 생존술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그 생존술은 자연스러운 문화로까지 정착되었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전태일과 경부고속도로』 개정증보판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은 1970~1972년, 제2권은 1973~1975년, 제3권은 1976~1979년의 역사를 담아냈다. 강준만은 한국처럼 현대사가 끊임없이 다시 쓰거나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할 필요성이 큰 나라는 없을 것이며, 한국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나라들의 비밀문서가 해제되고, 비극적인 과거에 대한 진상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배상과 보상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24년 전에 출간된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의 개정증보판을 펴낸다고 말한다.

‘조국 근대화’의 상징, 포항종합제철 준공

1969년 12월 3일 포항종합제철 공장 건설 자금 조달을 위한 한일간 기본협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지원 자금은 총 1억 2,370만 달러로 이 가운데 청구권 자금이 7,370만 달러, 일본 수출입 은행의 연불(年拂) 융자가 5,000만 달러였다. 박정희 정권은 포항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1970년 1월 1일 철강공업육성법을 제정했다. 이는 포항종합제철을 육성하기 위한 법이었다. 포항종합제철의 기공식은 1970년 4월 1일에 거행되었고, 1973년 6월 8일 첫 화입식(火入式)을 가졌으며, 7월 3일에 준공식을 거행했다. 연인원 81만 명의 건설 인력과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의 3배에 이르는 공사비를 투입해 여의도 3배에 이르는 넓은 부지에 연간 103만 톤 규모의 생산 능력을 갖춘데다 준공하자마자 생산 규모 확장에 들어간 포항종합제철은 울산석유화학 공업단지와 함께 박정희의 개발독재가 이룬 놀라운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박태준은 직원들에게 “포철은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포항제철 준공식 연설에서 박태준이란 이름을 3번이나 언급한 것도 그의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포항제철 완공을 위해 기울인 관심과 지원은 박정희의 개발독재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더욱이 박정희는 모든 주요 건설공사에서 예외 없이 공사비의 10%씩 거둬들였던 정치자금을 포항제철만큼은 면제시켜주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 포항제철을 13차례나 방문했고, 죽기 직전까지도 포항제철을 자랑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1973년을 기점으로 일본은 한국 경제에 미국보다 더 중요한 나라로 부상했다. 일본은 미국을 앞질러 수출입이 모두 한국 제1위 상대국이 되었다. 다시 말해 한국은 미국 대신 일본에 의존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

1973년 12월 24일 각계 민주인사 30명이 발기인이 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 선언이 터져 나왔다. 그날 민주인사들은 서울 YMCA 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한다는 것을 선포했다. 김종필은 개헌 운동의 즉각 중지를 요구했고, 박정희도 직접 나서서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소위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엄중히 경고해두는 바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살벌한 경고도 서명운동의 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서명운동 일주일 후인 1974년 1월 1일에 5만 명을 넘어섰고 1월 8일엔 10만 명에 육박했다. 그날 기독교청년협의회 회원 3,000여 명은 통일을 기원하는 예배 후에 가두시위를 벌였고, 5일엔 민주통일당이 개헌청원운동의 적극적 참여를 지지했다. 7일엔 문학인 61명의 이름으로 개헌 지지 성명이 나왔고, 8일엔 제1야당인 신민당이 개헌을 위한 전력 경주를 다짐했다.
박정희 정권은 1월 8일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했다. 유신헌법 제53조에 따라 대통령에게는 긴급조치권이 부여되었는데, 박정희는 이 긴급조치라는 전가의 보도를 빼든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휘두른 긴급조치라는 칼은 법대로 따지자면 박정희 자신이 선포한 유신헌법에 저촉되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비방 또는 반대하거나 개정을 주장만 해도 군사재판에 넘겨 15년간 징역형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또 긴급조치를 비방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라고 못 박아 “유신헌법은 개정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규정으로 우상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무조건 입 닫으라는 것이었다. 1월 15일 박정희 정권은 장준하와 백기완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했고, 1월 21일 도시산업선교회의 김경락·김진홍·박윤수·이규상·이해학·인명진 등 교회 목사와 전도사 11명을 구속했다. 1월 26일 개헌 지지 성명을 낸 이호철, 임헌영, 김우종, 정을병, 장병희 등 5명의 문인을 구속했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

1975년 4월 8일,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 피고인 38명에 대한 상고심 판결 공판이 열린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4월 9일, 사형 판결을 받았던 8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김용원, 도예종, 서도원, 송상진, 여정남, 우홍선, 이수병, 하재완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사형수들은 사형을 당한 후에도 모독을 당해야만 했다. 박정희 정권이 사형수들이 자신들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고 반성한 것처럼 유언까지 조작했기 때문이다. 박정희에게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걸까? 그는 후일 “크나큰 실책이라면 인혁당 8명을 처형한 것이 역사의 오점을 남겼다”고 고백했다. 1995년 4월 25일 MBC가 사법제도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판사 315명에게 보낸 설문조사에서도 인혁당 사건 재판이 “우리나라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이었다는 답이 나왔다. 이 ‘사법 살인’에 대해 국제법학자협회는 그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사형수들의 가족이 당한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사형수들이 사형당하기 전 그들의 아내들을 연행해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온갖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가하면서 “남편이 간첩과 같은 행동을 했다. 앞으로는 구명운동을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강요했다. 사형수 가족들은 평균 3개월에 한 번꼴로 이사를 해야만 했고, 변호사조차 제대로 만날 수 없었으며, 재판은 물론 사후 재판 기록조차 볼 수 없었다. 1998년 10월부터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활동을 시작했고, 그해 11월 9일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가 발족되었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결국 2015년 5월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가요 금지곡 양산과 대마초 파동

1975년 5월 13일 헌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헌법 비방 행위 금지, 학생 집회와 시위 금지 등도 포함되었다. 긴급조치 9호는 방송계에도 찬바람을 몰고 왔는데, 5개항의 실천 사항과 6개항의 방송 금지사항이 있었다. 특히 긴급조치 9호의 살벌한 분위기는 가요계에 가장 큰 타격을 입혔다. 1975년 한 해에만 225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포크 음악계는 ‘대마초 파동’까지 가세해 파국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대마초 단속은 1975년 12월 1일부터 시작되어 12월 3일에는 이장희·이종용·윤형주 등 27명이 구속되었고, 12월 6일에는 신중현·김추자·권용남·손학래 등 신중현 사단의 핵심 인물들이 구속되었다.
1974년 그룹사운드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한국적 록’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은 신중현은 대마초 파동으로 음악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미인>은 1974년 당시로선 놀랍게도 레코드가 100만 장이나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다. 신중현이 만든 수십 개의 곡은 ‘가요계 정화 조치’라는 미명하에 금지곡으로 묶이게 되었는데, 박정희 정권은 이렇다 할 이유도 제시하지 않았다. <미인>에서 <봄비>에 이르기까지 당시 히트했던 신중현의 노래들은 모두 사랑을 표현했던 것들이다. 신중현이 작사·작곡한 노래들 가운데 금지된 곡은 1969년에서 1974년까지 4곡, 1975년 한 해에만 17곡이나 되었다. 우회적 은유와 풍자도 금지 이유가 되었으니 모든 게 ‘엿장수 마음대로’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국심을 담은 <뭉치자>의 금지 이유는 ‘방송 부적’이었다. 나라 위해, 평화 위해 뭉치자는 내용의 곡인데 ‘방송 부적’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 곡을 금지시킨 이유는 데모가로 쓰일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은 반(反)유신 투쟁을 위해 미국과 도쿄를 왔다갔다했다. 도쿄에 있을 때인 1973년 3월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과 가까운 일본 자민당 소속 한 중진 의원에게서 “만약 김 선생이 귀국하면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이나 부통령제를 신설하여 부통령을 시켜드리겠다고 합니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걸 뿌리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7월 6일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그는 4일 후 한민통 도쿄 본부를 결성하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날아갔다. 일본에 입국한 7월 10일에서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8월 8일, 김대중은 도쿄에 있는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납치되었다. 결국 김대중은 미국의 개입으로 납치된 지 5일 만인 8월 13일 살아서 서울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제1부 제5장 김대중 납치 사건」

매매춘의 국책사업화는 비단 일본인 관광객들만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주한미군이 그러한 국책사업의 주요 고객으로 등장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박정희 정권은 기지촌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1970년대 초에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하고 있는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의 발표 이후엔 주한미군을 붙잡아두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러한 적극적인 정책은 주로 미군의 기지촌 환경 개선 요구에 적극 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주한미군과 박정희 정권은 1971년부터 1976년까지 합동으로 ‘군기지 정화운동’을 실시했는데, 이 운동은 사실상 박정희 정권이 전담하다시피해서 추진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안보와 교환된 ‘안락한 섹스’”를 위해 기지촌마다 성병 진료소를 만들고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매주 정기적으로 성병 검사를 실시했다. 또 기지촌 여성을 대상으로 ‘민들레회’와 같은 관제 자치기구를 조직했다. 「제1부 제11장 기지촌 정화운동과 가족법 개정운동」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발생한 박정희 암살 기도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의 부인 육영수가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당시 나온 당국의 발표는 의문투성이라 별로 믿을 게 못 된다. 최종 정리를 해보자면, 범인 문세광이 쏜 처음 총탄이 빗나가자 범인을 저격하기 위해 경호실장 박종규가 연단에서 뛰쳐나왔고 박종규를 노린 범인의 총탄에 육영수가 맞은 것이다. 그리고 박종규가 쏜 총탄은 빗나가 합창석으로 튀는 바람에 여고생 장봉화가 사망했다. 이 사건은 그간 너무 비대해진 경호실의 문제점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인 동시에 박정희 정권 체제가 사람을 얼마나 수동적으로 만든 체제인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경호원들의 위세는 어찌나 당당했던지 그들은 평소 경찰을 함부로 대했고, 행사 직전에도 경찰들에게 “우리들의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2부 제4장 박정희 암살 미수 사건」

  작가 소개

지은이 :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2007년 『한국일보』 ‘우리 시대의 명저 50권’에 선정되었고, 『미국사 산책』(전17권)이 2012년 한국출판인회의 ‘백책백강(百冊百講)’ 도서에 선정되었다.그동안 쓴 책으로는 『법조공화국』, 『MBC의 흑역사』, 『공감의 비극』, 『정치 무당 김어준』, 『퇴마 정치』, 『정치적 올바름』, 『좀비 정치』, 『발칙한 이준석』, 『단독자 김종인의 명암』, 『부족국가 대한민국』, 『싸가지 없는 정치』, 『권력은 사람의 뇌를 바꾼다』, 『부동산 약탈 국가』,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남 좌파 2』, 『바벨탑 공화국』,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손석희 현상』, 『박근혜의 권력 중독』, 『전쟁이 만든 나라, 미국』, 『정치를 종교로 만든 사람들』, 『지방 식민지 독립선언』,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 『싸가지 없는 진보』, 『감정 독재』,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 『갑과 을의 나라』, 『증오 상업주의』, 『강남 좌파』, 『한국 현대사 산책』(전28권), 『한국 근대사 산책』(전10권), 『미국사 산책』(전17권) 등 300권이 넘는다.

  목차

제1부 1973년 : 수출전쟁과 안보전쟁

제1장 박정희의 중화학공업화 선언
‘유신 옹호’, ‘중화학공업화’, ‘수출 지향 산업화’ · 21 자동차 산업과 조선 산업의 발전 · 24 중화학공업화 정책에 대한 비판 · 27 국제 분업구조와 공해 산업 유치 · 28 재벌의 거대화·독점화 촉진 · 29

제2장 제9대 국회의원 선거와 유정회
하나 마나 한 나눠먹기 선거 · 33 ‘유신의 친위대’ 또는 ‘청와대 특공대’ · 35 국회를 압도한 ‘행정 우위의 시대’ · 37

제3장 윤필용 사건과 전두환의 하나회
군부를 두려워한 박정희 · 39 청와대 밖에 있는 대통령’? · 40 박정희의 윤필용 제거 · 42 ‘하나회의 진짜 대부’는 박정희 · 44 육사를 장악한 하나회 · 46 ‘마피아 조직’과 흡사한 하나회 · 48 박정희의 군부 관리술 · 49

제4장 ‘조국 근대화’의 상징, 포항종합제철 완공
일본의 지원자금으로 건설한 포항제철 · 51 정치자금을 뜯기지 않은 포항제철 · 53 박정희의 포항제철 과시욕 · 54 한국의 대일 의존도 심화 · 56

제5장 김대중 납치 사건
김대중의 반유신 투쟁 · 59 중앙정보부가 벌인 5일간의 납치극 · 60 일본에 사과하고 4억 엔이나 바친 박정희 · 63 주범은 이후락인가, 박정희인가? · 64

제6장 남북대화 중단
6·23 선언의 ‘1민족 1국가 2정부’론 · 66 “남조선 깡패들과는 대화할 수 없다” · 67 북한의 ‘현실에 대한 판단 착오’ · 68

제7장 10·2 시위와 언론자유수호선언
남산 부활절 기도회 사건 · 71 ‘함성’, ‘고발’, ‘민우’, ‘기자협회보’ 사건 · 72 서울대 문리대 10·2 시위 사건 · 73 제2, 제3 언론자유수호선언 · 75 고등학생들의 시위 참여 · 76

제8장 서울대 법대 교수 최종길 의문사
중앙정보부의 엉터리 조작 발표 · 78 지하 유인물과 미국의 반발 · 79 동생 최종선의 ‘양심선언’ 수기 작성 · 81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추모 미사 · 83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밝힌 진상 · 83

제9장 가로등마저 끄게 만든 ‘오일 쇼크’
갑자기 어두워진 밤거리 · 87 “쓰레기통에 휴지가 없다” · 88 신문과 방송에 미친 영향 · 90

제10장 일본인 기생 관광 붐
부산-시모노세키의 페리호 취항 · 91 문교부 장관의 매매춘 장려 발언 · 92 ‘수출정책’의 일환으로서의 매매춘 · 94 화대 착취 구조를 묵인한 정부 · 97 한국인의 경제동물화 · 98 과시적인 기생 관광 행태 · 99 ‘4·19의 4월’에서 ‘관광의 4월’로 · 100 여성계의 적극적인 반대 투쟁 · 101 ‘현지처’가 되는 건 기생 관광 종사자의 꿈 · 104

제11장 기지촌 정화운동과 가족법 개정운동
‘국방정책’으로서의 매매춘 · 106 “우리는 신발이 아니라 인간이다” · 108 ‘외교정책’으로서의 매매춘 · 110 가족법 개정운동과 유림의 반발 · 111 유림을 비롯한 보수 세력의 두 얼굴 · 113 “인권을 수단화하는 문화” · 114

제12장 언론인의 정관계 진출
정부 부처 대변인으로 변신한 언론인 · 116 정관계와 언론 사이의 회전문 · 118 정치부 기자의 추락, 군 출입기자의 득세 · 119

제13장 ‘유신 방송법’과 ‘유신 영화법’
‘유신 방송법’의 탄생 · 121 한국방송공사와 새마을운동 · 122 김일성을 닮아간 박정희 · 124 TV 드라마의 특정 지역 차별 · 126 ‘유신 기자’와 ‘오촌 오빠’의 등장 · 127 ‘유신 영화법’의 탄생 · 128

제14장 TV 일일연속극 붐
수신기 대중화, 내용의 통속화 · 131 TBC <아씨>의 인기 · 132 KBS <여로>의 인기 · 134 일일극 홍수 사태 · 136

제15장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
장발은 ‘외래·퇴폐 풍조’의 상징 · 138 박정희의 장발에 대한 혐오감 · 140 그룹사운드의 비애 · 141 미니스커트 단속 풍경 · 142 초등학생들까지 단속 대상 · 144 장발 단속의 정치적 의미 · 145 미니스커트, 핫팬츠, 판탈롱 · 146

제2부 1974년 : 긴급조치와 민주화 투쟁

제1장 헌법개정 백만인 청원운동
개헌청원운동본부의 발족 · 151 긴급조치 1, 2호 발동 · 152 긴급조치 이미지 조작을 위한 긴급조치 3호 · 154 ‘정찰제’ 판결과 ‘문인 간첩단’ 사건 · 156 김동리의 희한한 여론조사 · 158

제2장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비밀이 새나간 ‘4·3 총궐기’ 계획 · 159 4·3 시위와 긴급조치 4호 · 160 박정희 정권의 인간성 파괴 공작 · 162 고문으로 조작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 164 민청학련 사건의 3대 세계 기록 · 165 민청학련 사건의 의미와 효과 · 168 구속자가족협의회 탄생 · 169 “김택수, 민청학련 자금줄이었다” · 169

제3장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전환시대의 논리』가 준 충격 · 171 리영희의 대안 언론 행위 · 173 베트남, 중공, 북한에 대하여 · 174

제4장 박정희 암살 미수 사건
경찰을 허수아비로 만든 경호실의 위세 · 177 ‘도쿄 폭격론’에서 ‘국민총화’로 · 178 76회나 방영된 육영수 피격 장면 · 180 전국을 휩쓴 육영수 추모의 물결 · 183 반공정신 무장의 기회 · 185 김대중 납치 사건이 원인이었다 · 187

역사 산책 1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 189

제5장 경호실장 차지철의 ‘보위 경호’
왜 경호실장이 차지철로 바뀌었는가? · 192 박정희를 교주로 모신 차지철 · 193 차지철의 ‘보위 경호’ · 194 경호실 작전차장보의 역할 · 196 박정희 유일체제의 비극 · 197

역사 산책 2 박정희의 엄격한 친인척 관리 · 199

제6장 김영삼의 신민당 총재 당선
최연소 야당 총재의 탄생 · 202 차지철의 야당 공작 실패 · 204 개헌 투쟁 선언과 박정희의 위협 · 204

제7장 김수환, 지학순, 정의구현사제단
김수환의 1971년 성탄절 미사 강론 · 206 김수환의 1972년 8·15 시국선언 · 207 지학순의 양심선언과 석방 기도회 · 208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김수환 · 210

제8장 자유언론실천선언과 『동아일보』 광고 탄압
박정희 정권의 언론통제 · 213 부정부패도 ‘국가안보’로 은폐한 박정희 정권 · 214 31개 언론사로 파급된 ‘자유언론실천선언’ · 217 박정희가 직접 지시한 광고 탄압 · 219 언론 기능을 대신한 광고 · 220

제9장 포드의 방한,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
100만 달러를 주고 산 포드의 방한? · 223 미국 친한파 의원에 대한 환대 · 225 민주회복국민회의의 발족 · 227 박정희 정권의 공격적인 보복 · 229 탄압으로 강요된 영남 지역의 보수성 · 230

제10장 도시산업선교회와 한국노총의 충돌
‘어용노조’와 ‘민주노조’의 싸움 · 232 영등포산업선교회와 인천산업선교회 · 233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한 탄압 · 235 산업선교와 한국노총의 성명전 · 236 박정희 정권과 보수 기독교 세력의 ‘지원 사격’ · 238 조지 오글과 제임스 시노트 추방 · 239

제11장 여의도 엑스플로 74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 · 242 김준곤과 박정희의 관계 · 243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 244 친독재적 전도대회 · 245 독재정권을 비호하는 제사장 종교 · 247

제12장 고등학교 평준화 조치
경기 출신 장관이었기에 가능했던 고교 평준화? · 248 고교 평준화의 연차별 확대와 축소 · 249 학교 교육 외면과 과외 열기 심화 · 251

역사 산책 3 ‘KS 마크 병’ · 253

제13장 ‘별들의 고향’과 ‘청년문화’ 논쟁
최인호와 ‘대중문학 논쟁’ · 256 왜 우경아는 사랑을 받았는가? · 258 “난 대중작가다! 넌 소중 평론가냐?” · 260 정치학·사회학 대 인문학·문학의 갈등? · 264 ‘바보들의 행진’과 청년문화 · 265

역사 산책 4 고고와 미팅 · 267

역사 산책 5 스트리킹 · 270

제3부 1975년 : 병영국가 체제의 완성

제1장 한국 기업들의 중동 진출 붐
‘공기 단축’ 신화를 선보인 삼환 · 275 한국의 세 가지 장점 또는 비교우위 · 276 1970년대 후반 연평균 76%의 성장률 · 278 ‘국가적인 경사’를 만든 현대의 활약 · 279

제2장 수출전쟁의 첨병, 종합무역상사
종합무역상사란 무엇인가? · 282 ‘낙수효과’ 또는 ‘선성장 후분배론’ · 284 대기업을 키우기 위한 정책 · 286 재벌의 ‘문어발’, 중소기업의 위축 · 287

제3장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
대통령직을 건 국민투표 · 289 박정희 정권의 투표 찬성 선동과 ‘행정 투표’ · 291 “신은 나에게 또다시 중책을 맡기시다” · 293 고문과 은폐로 유지된 정권 · 294 박정희의 적반하장 · 296 최형우의 고문 폭로 · 298 김지하의 고문 폭로 · 299 ‘어떤 조사’ 사건 · 300

제4장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 투쟁
『조선일보』 내부의 노사갈등 · 303 32명의 기자를 해고한 『조선일보』 · 304 자유언론실천에 대한 노사의 동상이몽 · 307 『동아일보』의 기자 축출 작전 · 309 113명의 기자를 해고한 『동아일보』 · 311 출판을 통한 대안 언론 활동 · 312 해직 기자들의 새로운 생활 투쟁 · 314 송건호와 조민기의 투쟁 · 315 강화된 언론사 폐쇄성 · 317

제5장 인혁당 사건 8명 사형 집행
“사법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재판” · 319 박정희 정권의 야수적 행위 · 321 사형수들의 가족이 당한 고통 · 323 “살인마 박정희 천벌을 받아라” · 325 법정 스님의 민주화 투쟁 · 327 ‘소유’에 저항한 ‘무소유’의 사상 · 329

제6장 서울대생 김상진의 할복자살
갑작스러운 긴급조치 7호 발동 · 332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 · 334 언론 보도와 추도식을 막은 박정희 정권 · 335 월남 패망이 살려준 박정희 정권 · 337

제7장 월남 패망과 긴급조치 9호
북한의 땅굴과 신뢰받지 못한 박정희 정권 · 338 4·17 캄보디아 적화, 4·30 월남 패망 · 339 베트남 파병의 결산 · 340 “민주정치를 박살내는 핵폭탄” · 343 학도호국단 결성과 5·22 시위 · 345 서울대 앞 ‘동양 최대의 파출소’ · 346 ‘하’ 사건까지 낳은 5분 시위 · 347

역사 산책 6 대학 문화패들의 활약 · 349

제8장 박정희와 김영삼의 회담
비밀에 붙인 회담 내용 · 351 김영삼의 변절인가? · 352 ‘신민당의 패배’로 여겨진 ‘김옥선 파동’ · 353 박정희의 눈물에 속은 김영삼 · 356

제9장 강력한 언론통제와 ‘4대 전시입법’
‘언론부조리 숙정에 관한 결의문’ · 357 프레스카드제 통제와 보도지침 강화 · 359 ‘4대 전시입법’ 국회 통과 · 360 6·23 선언과 전향 공작 테러 · 361 서준식의 치열한 투쟁과 증언 · 363 신원조사제도와 낙인 효과 · 365

제10장 장준하 의문사 사건
의문의 추락사와 장준하 암살설 · 367 장준하 사망의 의문점 · 368 친미반공주의에서 민족주의로 · 369 가족까지 희생시킨 투철한 언행일치 · 370

제11장 박정희와 김일성의 국제적 이미지 경쟁
1975년은 남북간 경제력 차이의 분기점 · 372 남북간 치열한 외교 전쟁 · 373 김일성의 제3세계 외교 · 374 박정희의 대미 언론플레이 · 376

제12장 학도호국단 부활과 대학의 병영화
학생회를 없애고 만든 학도호국단 · 379 병영으로 변한 대학과 지식계 · 381 사격술 훈련 시간이 된 체육 시간 · 382 교사가 전권을 행사하는 교사 독재체제 · 383

역사 산책 7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준공 · 385

제13장 반공 드라마와 정책 홍보 드라마
일일연속극에 대한 비판 · 387 ‘반공 드라마’로 유도 · 389 정책 홍보성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의 성공 · 390 홍보 효과를 위한 실화 이용 · 393

제14장 가요 금지곡 양산과 대마초 파동
네 차례나 시달된 방송 정화 실천요강 · 395 포크 음악계의 파국을 초래한 대마초 파동 · 396 신중현 노래의 방송 금지 사유 · 398 김민기·양희은의 <아침이슬>도 금지곡 · 399 대마초 파동 덕분에 향상된 CM · 400

제15장 ‘영자의 전성시대’와 가족법 개정운동
시내버스 여차장의 삶 · 401 ‘고속도로 근대화의 비극’ · 403 ‘영자의 전성시대’의 역설 · 404 여성 인권 위협한 충효 이데올로기 · 405 크리스천아카데미의 의식화 교육 · 407 여성 차별의 온상이 된 가족법 · 407 유림의 결사적인 반격 · 409 노동계의 여성 차별 · 411 민주·진보적 남성들의 여성 차별 · 412

역사 산책 8 박동명 사건 · 414

역사 산책 9 여성을 우대한 『한국일보』의 파격 · 416

주 ·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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