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일본에서 일본 근현대 문학을 강의하는 지은이는 그간 일본제국의 근대사 다시 쓰기를 주장해왔다. 그 결과 『전후라는 이데올로기』, 『검열의 제국』 등의 성과물을 일궈냈다. 여기서 ‘전후’라는 프레임을 통해 구축된 일본의 근대사는 패전국 일본의 희생자 의식에 의해 성립되었고 한반도 ‘식민지민’들의 체험조차도 자신들의 희생 담론을 설명하는 비유로 사용해왔다는 점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기억이 어떻게 망각되었는지를 밝힌 바 있다. 이번 책은 지은이의 연구 활동의 연장선에 있다. 한국에서의 제국 연구는 제국 일본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하고 일본어와 한국어 자료가 어떻게 복잡하게 얽히면서 교착하는지에 관한 분석이 충분하지 않다. 지은이는 양국의 자료를 세심하게 살펴 이런 한계를 뛰어넘으면서 출판 검열 등과 같이 피해와 가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일본어가 갖는 양의적 역할, 즉 일본어를 통해 일본에 대항하는 법을 배웠다는 점 등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사고로는 잡아낼 수 없는 부분에 주목했다.프롤레타리아Proletarier라는 말이 일본에 수입됐던 시기에 번역자들이 상정한 계급이란, 앞서 후지노 유코가 서술했던 ‘일본인 남성 집단’과 거의 겹쳤고 애초부터 ‘조센징’은 안중에도 없었다. 프롤레타리아의 개념을 일본에 적용하기 위한 모색은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의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일본어로 옮긴 이는 고토쿠 슈스이와 사카이 도시히코이다.
사카이는 Proletarier의 번역어로 처음에 ‘평민’을 택한 경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번역어들 가운데 오늘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사紳士’와 ‘평민’이 라는 낱말인데, 그 말들의 원어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이다. ‘평민’은 당시의 평민사, 《평민신문》을 생각할 때 그 느낌이 잘 살아있는 번역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내겐 ‘평민’만으로는 부족했고, 이 때문에 다른 데서는 ‘평민, 즉 근대 노동계급’이라 쓰기도 했었다.”
아라하타 간손이 편집한 《사회주의 전도 행상 일기》(신센샤新泉社, 1971)의 표지인데, 청년 두 사람이 끌고 있는 짐수레는 러일전쟁 때의 우유배달용 수레와 동일한 형태이다. 이 수레에 관한 최초의 서술은 1904년 3월 13일 자 《평민신문》의 〈행상 전도의 소식〉란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두 사람은 도보로 전국을 돌며 집회를 열면서 짐수레에 싣고 있던 ‘사회주의 서적류’를 팔고 다녔다.
작가 소개
지은이 : 고영란
일본 니혼日本대학 국문학과 교수. 도쿄살이 32년째. 일본의 근현대 문학을 강의하고 연구한다. 2010년 무렵부터 비/합법 출판물(‘불량한 책’)들의 생존 방식에 주목하며 연구해 왔다. 이 책은 일본제국에 맞선 대항운동이 정치 권력의 탄압을 부가가치로 전환해 자본을 만들어내고, 그 자본을 바탕으로 다시 대항운동을 지속시키는 힘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지금은 1960년대 일본에서 급부상한 ‘한국’ 담론과 젠더 정치의 관계를 다룬 책을 준비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전후라는 이데올로기》(현실문화, 2013), 《출판제국의 전쟁出版帝國の戰爭》(호세이대학출판국, 2024), 공·편저 《검열의 제국》(푸른역사, 201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