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신령은 종차별과 성차별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세계관 속에서 여성, 퀴어, 성노동자, 정신장애인, 비인간 동물, 서툰 외국어 사용자 등 다양한 소수자들과 호흡하며 부단한 연대 활동을 이어가는 ‘퀴어 페미니스트 비건 샤먼’ 정홍칼리가 3년만의 신작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이번 책을 계기로 ‘홍칼리’ 대신 ‘정홍칼리’라는 새 이름을 택한 그는 말 그대로 자기 존재와 정체성의 흔적인 여러 ‘이름들’을 유영한다.
《틈새 연대기》는 강간을 당한 뒤 무작정 한국을 뜨게 된 그가 해방인지 추방인지 모를 알쏭달쏭한 여정에 오르며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는 처음으로 떠난 인도에서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며 자신이 구조의 질서에서 밀려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방인의 신분으로 세계 곳곳을 표류하며 차별과 폭력의 구조를 문제 삼는 질문들을 날카롭게 다듬어나간다.
질문의 대상은 주로 이런 것들이다. 문명을 떠받치는 뿌리 깊은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그 안에서도 핵심이 되는 남성중심의 가부장 국가권력, 사람들의 내면을 지배하는 서구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와 백인중심주의. 그 구조와 질서는 이곳 한국 땅을 넘어 지구 구석구석을 지배하며 인간/비인간 소수자들을 추방한다.
그리하여 그는 ‘일종의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국에 대한 낭만과 자본주의적 친절함으로 포장된 여행 상품 뒤에 어떤 ‘권력’과 ‘억압’이 흐르고 있는지 스케치하기로 한 것이다. 가난한 이방인 여성으로서 차별의 ‘틈새’를 지나며 건져 올린 그 이야기들은 한계 없이 이어지는 소수적 정체성으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타자와 조우하고,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해가는 여정이다.
출판사 리뷰
그것은 해방이었을까 추방이었을까
지구 구석구석 차별의 틈새를 지나며 건져 올린 넋과 목소리
밀려나고 추방된 몸들의 길을 묻는 연대의 여정
“신령은 종차별과 성차별을 넘어서는 존재”라는 세계관 속에서 여성, 퀴어, 성노동자, 정신장애인, 비인간 동물, 서툰 외국어 사용자 등 다양한 소수자들과 호흡하며 부단한 연대 활동을 이어가는 ‘퀴어 페미니스트 비건 샤먼’ 정홍칼리가 3년만의 신작으로 독자들을 만난다. 이번 책을 계기로 ‘홍칼리’ 대신 ‘정홍칼리’라는 새 이름을 택한 그는 말 그대로 자기 존재와 정체성의 흔적인 여러 ‘이름들’을 유영한다.
《틈새 연대기》는 강간을 당한 뒤 무작정 한국을 뜨게 된 그가 해방인지 추방인지 모를 알쏭달쏭한 여정에 오르며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는 처음으로 떠난 인도에서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느끼며 자신이 구조의 질서에서 밀려났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방인의 신분으로 세계 곳곳을 표류하며 차별과 폭력의 구조를 문제 삼는 질문들을 날카롭게 다듬어나간다. 질문의 대상은 주로 이런 것들이다. 문명을 떠받치는 뿌리 깊은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그 안에서도 핵심이 되는 남성중심의 가부장 국가권력, 사람들의 내면을 지배하는 서구중심주의(오리엔탈리즘)와 백인중심주의. 그 구조와 질서는 이곳 한국 땅을 넘어 지구 구석구석을 지배하며 인간/비인간 소수자들을 추방한다.
그리하여 그는 ‘일종의 여행기’를 쓰기 시작한다. 이국에 대한 낭만과 자본주의적 친절함으로 포장된 여행 상품 뒤에 어떤 ‘권력’과 ‘억압’이 흐르고 있는지 스케치하기로 한 것이다. 가난한 이방인 여성으로서 차별의 ‘틈새’를 지나며 건져 올린 그 이야기들은 한계 없이 이어지는 소수적 정체성(여성, 아시아인, 퀴어, 무당, 성노동자, 정신장애인, 약초 수행자, 비영어 사용자……)으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고, 타자와 조우하고,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해가는 여정이다. 여행기에서 출발하는 이 기록은 끝내 여행기를 거부하며 작은 일상 곳곳에 패인 차별의 틈새들 속으로 쉴 새 없이 흘러간다. 이 기록을 통해 독자들은 은밀히 학습된 혐오의 시선들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다른 언어와 인종, 문화적 배경을 가진 타자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을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그 이방인들을 환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사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살아 있는 것은 강력한 권력이다. 나는 이 구조가 누군가를 가두는 걸 막을 수도, 누군가를 가두는 구조를 강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나를 가두었던 폭력과 한패가 된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질서를 거스르는 말을 뱉다 보니,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하나둘 붙었다. 떠돌이, 창녀, 귀신 들린 몸, 반동분자, 관심종자, 빨갱이, 꼴페미, 무당, 미친년…… 이것은 폭력에 저항한 자국이고, 살아남으려 했던 흔적이다. 그리고 낙인은 더 이상 나에게 수치심과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추방: 밀려난 몸으로 길을 찾아 나서다
“바리데기가 저승으로 걸어가듯, 나도 저승에 가는 마음으로 인도에 갔다. 하지만 막상 도착한 인도는 저승이 아니라 고향 같았다. 알록달록한 냄새와 소리로 분주한 생의 마당.”
그는 깊은 절망을 연료 삼아 떠난 인도에서 ‘해방의 감각’을 되찾았다고 이야기한다. 향의 연기가 피어오르는 작은 골목길, 꽃잎과 모래, 돌멩이로 만드는 만드라,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들이 건네는 손짓, 길거리의 동물들…… 이런 풍경 속에서 그 옛날 “모래를 누비고 돌멩이로 집을 만들며 사물과 대화하던 감각”이 되살아났다고.
그러나 이 해방의 감각은 추방의 맥락과 동시에 존재했다. 한국에서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수 없었던 맥락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폭력적인 가부장 아빠가 있었고, 거리로 나가 ‘시스템을 바꾸자’고 목소리를 높이면 여지없이 ‘종북’,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혔다. 무엇보다 한국은 성차별과 성폭력이 득실대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집의 보호도, 나라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살아야 했다. 성노동을 하든 안 하든, 강간을 당하든 당하지 않든 언제나 보호받지 못했다. …… 굳이 한국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몸은 한국을 떠나왔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고통의 진동이 계속됐다. 차별과 폭력의 흔적들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른 존재들의 고통이 선명히 느껴질 때, 그 해방감은 곧 “폭력을 방관하고 유지하게 하는 마취제”였다. 해방의 감각 또한 장애가 없는 신체 혹은 여타의 문화적 자원들과 얽혀 있다는 진실은 이 여정에 한계를 드리웠다. 나 한 사람의 해방이 고통받는 모든 존재들과 세계의 변화에는 관여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스스로를 모든 사회적 파별과 폭력에서 동떨어진 존재로 두고 기도만 한다는 건 무책임한 것 아닌가? 결국, 그 모든 맥락이 동시에 존재했다. 해방과 추방과 포섭.
“자유로운 영혼의 여정으로서의 여행, 요가와 명상, 힐링, 영성 상품들이 가리키는 곳은 결국 각자도생, 각자도살의 세계가 아닐까. 홀로 성장하거나, 홀로 죽게 내버려두는 고립의 세상.”
표류: 지구 구석구석 차별의 틈새를 지나다
“권력에 저항하는 권력자들은 자신이 차별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권력은 언제나 몰라도 되기에 모르는 채로 차별을 한다.”
기존 질서에서 밀려난 이들에게 도망은 본능적인 선택일지 모른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인간중심주의, 국가권력과 같은 지배 질서는 지구 어디에서든 활개친다. 어떤 이들은 이런 세상사를 일찍이 받아들여 안정된 삶을 설계하지만, 그런 정상성 자체를 낯설게 바라보며 그것으로의 소속을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끊임없는 과업에 속박되는 것보다 완전한 방치를 선호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견디고 성취하는 것보다 밑도 끝도 없이 망해버리는 것을 택하는 삶. 계속해서 도망치고 떠나는 이유는 정상성의 질서 안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다.
저자는 그런 삶을 택했다. 그런 그에게 지구란 계속 도망갈 수 있을 만큼 넓은 세상이다. “차별금지법은커녕 여성을 대놓고 혐오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고, 그가 내란을 일으킬 수도 있는” 나라에서 생을 견디는 것보다 지구 곳곳을 마음껏 떠도는 게 훨씬 나으니까.
하지만 끊임없이 도망치더라도 끝내 벗어날 수 없는 공간들이 있었다. 해외에서 생활하는 동양인, 여성, 성소수자, 난민, 비인간 동물성 등을 바라보는 납작한 혐오의 시선들이 그랬다. 그 차별의 틈을 지나며 건져 올린 다채로운 질문들이 이 책을 관통한다. 이방인, 여성, 퀴어, 서툰 외국어 사용자로서 세계를 표류하며 만난 구조의 민낯을 드러내는 동시에, 한국 국적자, 비장애 신체의 특권으로 자신이 밀어내고 지운 존재들은 없었는지 되묻는다.
무엇보다 문제적인 것은 부당한 구조에 저항하는 이들조차 자신의 특권을 성찰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가 세계를 떠돌며 만난 이들 중에는 남다른 저항정신으로 체제를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들은 정작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력은 보지 못했다/않았다. 인도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독립운동을 하던 한 남성은 티베트의 평화를 위해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와중에도 여성을 동료/동지가 아닌 운동을 보조하는 존재로 대했고, ‘진지한 수행자’처럼 보이는 힌두교 구루는 여성을 동등한 수행자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여기며 틈만 나면 성추행을 시도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여성으로 패싱되는 몸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수행처에서조차 차별받았다. 힌두교 사원, 이슬람 사원, 시크교 사원, 불교 사원 등 그 어떤 종교에서도 예외 없이 여성에게만 ‘여성성 벗기 규율’을 강요하고 있었다.
“금욕은 머리에 꽃을 꽂고 웃는 미친 여성이 아니라, 근엄한 남성 수도승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비천한 모든 존재를 위해 기도한다. ‘더러운’ 여성을 등지고서.”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여성으로 보이는 수행자를 여성으로 대상화하지 않는 게 수행이다. 그런데 그 업을 닦는 수련은 하지 않는다. …… 그 존재가 수행하고 있다는 진실을 보지 않고, 금욕 안에 숨겨진 여성혐오 역시 성찰하지 않는다. 그런 걸 성찰하는 수행처는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 의도적 무지와 성찰하지 않음은 광장에서 흘러나오는 혐오의 목소리와도 닮아 있다. “최근에는 광장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왜 페미니즘 이슈를 끌고 오느냐, 난민까지 어떻게 챙기냐, 비인간 동물까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오직 ‘인간 남성 국민’의 특권을 위협한 정권에 대한 분노만이 실려 있다. 자신의 특권을 지키는 것만이 중요한, 그래서 손해가 보상되면 곧바로 중단되는 투쟁. 그런 투쟁만 ‘쟁취’하니 세상이 아직 이 모양이다.”
횡단: ‘미친년’의 몸으로 구조를 흐르다
“많은 존재가 한꺼번에 실릴 때 내 눈은 깜빡거린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정상성의 망령에 저항하는 몸짓이고, 눈에 깃든 영혼을 지키려는 반사 작용이다. 넋들은 손가락 끝에 실려서 글이 된다. 문장 사이에서 고요히 잠들거나 깨어난다.”
칼리, 승희, 홀리, 릴리, 초의, 카타리나, 수림…… 저자는 무척 다양한 이름을 유영한다. 예명이자 필명이자 활동명이자 신명이기도 한 ‘칼리’로 활동하고 있지만, 만나는 사람들과 공동체에 따라 그를 부르는 이름들도 흐른다. 그리고, 이름을 유영하듯 그는 새로운 정체성을 탐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부여하는 걸 좋아한다. 논바이너리, 릴레이션십 아나키, 퀴어 페미니스트, 비건 지향, 디지털 떠돌이 노동자, 부무(떠도는 무당), 글로벌 성노동자…… “하지만 결코 상품처럼 라벨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기존의 언어로는 나를 설명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기 때문이다. 전부 영어이긴 하지만, 통용되는 언어가 그것이니 빌려 쓸 뿐이다. 임시의 언어라도, 이 언어의 집은 나를 허용한다. 정체성은 분류가 아니라 흐름이니까.”
이번 책 《틈새 연대기》에서는 오랫동안 썼던 활동명 ‘홍칼리’를 ‘정홍칼리’로 바꾸기도 했다. 자신을 낳고 기른 엄마 ‘아난다’의 흔적을 이름에 포함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가부장제의 공고한 유산을 넘어서는 틈새의 저항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건 출산을 누락하고, 그 흔적을 태어난 존재에게 부여되는 이름에서조차 지우고자 한다. 물론 아난다의 성씨인 ‘정’ 역시 그녀 아버지의 성씨이지만, 그래도 그건 지금의 아난다를 자신의 이름에 새기는 최소한의 방법일 수 있다. ‘정홍칼리’라는 이름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렇듯 다양한 이름들을 생성해내는 시도는 억압적인 체제/구조가 그에게 붙인 낙인들을 부정하는 대신, 그것들을 모두 그러모아 존재의 기반이자 긍정적인 정체성으로 재해석하고 재발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낙인은 내가 통과한 정체성이자 떠도는 넋의 자리였다.” 그의 여행은 쫓겨나고 밀려난 자리에서, 그렇게 떠돌게 된 자리에서, 그리고 떠도는 와중에 또다시 추방된 그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그 자리는 곧 국가와 정상성의 질서에서 밀려나고 또 밀려난 몸이 오게 된 막다른 곳이기도 했고, 동시에 예상치 못한 틈새의 해방구이기도 했다.
홈 패인 틈새를 흐르며 ‘떠도는 삶’은 그의 존재 양식 그 자체다. 그가 자신의 중요한 정체성으로 꼽는 샤머니즘은 물론이고, 오래 지속해온 글쓰기와 기록, 그리고 생계의 수단이었던 성노동 역시 떠돌고 흐르는 한 가지 방식이다. 샤머니즘은 죽은 존재, 비인간 동물, 식물, 사물 등 ‘역사’에서 혹은 ‘윤리’의 주체에서 밀려나는 존재도 말할 수 있게 해주고, 글쓰기는 차별과 폭력의 구조에서 입막음당한 존재들의 넋을 위로하며, 성노동은 다양한 관계를 경험하게 해주는 퍼포먼스 공연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떠돌이의 삶을 덮어놓고 낭만화하는 것으로 오해해선 곤란한다. 오히려 그 삶은 구조에서 밀려난 이들의 자리 없음을 이야기하는 통로이자, 그러면서도 그 삶을 긍정하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적극적인 실천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가부장 자본주의의 구조가 어떤 낙인들을 생산하며 스스로를 지탱시키는지 드러내는 전복적인 읽기이기도 하다. 그 실천 속에서, 덧씌워진 낙인들은 폭력에 저항한 흔적이 된다.
특히 성노동에 대한 낙인을 스스로의 성노동 경험을 통해 전복하고자 하는 특유의 시도는 가부장 자본주의가 여성들이 수행하는 갖가지 무급 노동을 어떻게 허울 좋은 연애/로맨스로 둔갑시키는지, 그렇게 함으로써 어떻게 여성들에 대한 착취를 영속화하는지 날카롭게 드러낸다. 성노동(자)에 대한 낙인(‘창녀’)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서든 존재한다. 이런 낙인의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창녀’라는 낙인은 권력자가 아닌 “나와 닮은 또 다른 약자”를 향하는 혐오의 잔인성과 맞닿아 있다. “창녀에 대한 멸시는 여성혐오의 뿌리다. 혐오는 여성이 자기 자신을 수치스러워하고, 또 다른 여성을 감시해야 유지된다. 그래서 오늘도 가부장 자본주의는 여성의 몸 위에 ‘창녀’라는 낙인을 족족 찍어댄다.” 그는 이에 맞서 가부장 자본주의 체제에서 유지되는 ‘이성애 로맨스 관계’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 로맨스/연애라는 이름이 붙은 관계에서 여성이 아무런 보상과 대가 없이 강도 높은 감정적, 신체적 노동을 수행해야 한다고 할 때, 또한 그것이 가부장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동력이라고 할 때, 차라리 계약 조건이 명확한 프리랜스 성노동이 덜 피로하고 안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성노동이란 단지 돈을 받고 하는 성기 결합 섹스가 아니다.
“‘여성 역할을 수행하는 모든 노동’이 성노동이다. 물어보지 않은 이야기를 경청해주고, 미소를 짓고, 남성의 감정을 받아주는 것까지 포함되는 노동. 모든 존재가 능력에 관계없이 보호받고, 여성에게 부여되는 성노동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라면 굳이 이 노동을 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성애 독점 로맨스 신화는 여성성을 수행하는 존재의 노동을 당연한 권리로 누리게 해준다.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거나 특별히 감사해할 필요 없이. 결국 여성의 성노동은 언제나 공짜여야 하고, ‘순수함’을 지켜야 한다. 그런 ‘기준’을 벗어나는 순간 여성은 ‘창녀’라는 낙인을 입게 된다.”
그렇다면 ‘미쳤다는 것’은 어떨까? 정신장애 역시 사회가 정해놓은 정상성의 경계를 벗어나는 행위/증상으로 여겨지니 말이다.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을 당한 경험이 있는 그에게 정신장애는 성노동만큼이나 깊이 새겨진 낙인이다. 각종 진보적인 운동에서조차 정신장애를 배제하는 흐름 앞에서 그는 혼자만 감옥/시설에서 빠져나오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낀다. “나만 빠져나오면 되는 걸까. 그런 감옥을 부수려고 온갖 정체성을 횡당한 거였는데. 내가 안정감을 되찾을수록 정신병동 안의 느린 걸음과 온전한 눈빛들이 아른거렸다. 내가 그렇듯 당신도 온전한데.” 자신의 조현, 자신의 공황, 자신의 정신장애에 대해 쓰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정신장애를 드러낸다는 게 더 많은 억압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이유는 글이 곧 “이어 쓰는 연대”이기 때문이다. 당장 모든 시설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인식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쩌면 가능할 테니까.
“생각해보면 이미 나에겐 각종 낙인이 붙어 있다. ‘타락한’ 성노동자라느니, ‘미신을 믿는’ 무당이라느니. 애초에 경청할 만한 존재가 못 되니 이 글을 읽는 이는 소수일 것이고, 내 말을 경청하는 이들은 분명 나와 비슷한 감옥에 있던 이들일 것이다. 그들은 나를 감옥에 가두지 않을 것이다.”
연대: 미친년의 자리에서
“어떤 존재가 온전치 않다고 함부로 판단하는 잣대. 거기에 터를 잡은 망령귀가 있다. 그것을 나는 ‘정상성의 망령’ 혹은 ‘가부장 망령귀’라 부른다.”
저자가 운영하는 신당을 찾는 이들 중에는 정상의 언어에 지친 이들이 많다. 대부분의 무당과 달리 그는 손님들을 ‘정상’으로 돌이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정상의 언어로 담을 수 없는 감각을 존중하며 일상을 돌볼 수 있는 루틴을 안내하기도 하고, 퀴어 페미니즘과 비거니즘, 장애학과 관련된 책과 글쓰기를 소개하기도 한다. 정상성을 기준으로 빙의자를 진단하는 빙의굿 대신, 타자에게 혐의와 낙인을 뒤집어씌우는 것들을 떠나보내고 만물의 존엄과 신성을 감각할 수 있는 의례를 이어간다.
“비인간 동물과 인간 여성, 장애인과 소수자들을 학살하는 구조의 얼굴로, 전쟁 무기를 지원하는 정부와 대기업의 얼굴로. 지구 어디서나 존재하는 시스템의 얼굴로, 때로는 구체적인 인간의 얼굴로. 폭력을 전파하는 그것은 혐오를 먹으며 한을 만든다. …… 망령귀를 내쫓는 방법은 그것의 정확한 이름을 알아내고 부르고 기록하는 것이다. 그 망령귀를 내쫓는 자리가 미친년인 나의 자리다.”
그는 오늘도 ‘미신’이라거나 ‘병리적’이라며 밀려난 상상력, 비인간과의 교감, 사회적 실천과 돌보는 하루가 경계 없이 공존하는 틈새의 해방구에 서 있다. 더 이상 떠나지 않고 이곳에 머무르면서, 계속해서 여행을 이어간다.
“돌아온 자리에서, 나는 또 어디로 흘러갈까? 어떤 이름을 벗고, 어떤 마음을 입으며 다시 태어날까?”
떠돌이, 창녀, 귀신 들린 몸, 반동분자, 관심종자, 빨갱이, 꼴페미, 무당, 미친년…… 이것은 폭력에 저항한 자국이고, 살아남으려 했던 흔적이다. 그리고 낙인은 더 이상 나에게 수치심과 두려움을 주지 못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낙인에 눌리던 수천억의 넋들이 나와 함께한다. 이 책도 나 혼자서 쓰지 않았다. 넋들의 한을 풀려고, 동시에 내 억울함을 풀려고 썼다.
이 책은 단순히 떠남을 찬양하는 여행기가 아니다. ‘방황하다 정착하는’ 성장기도, 대안 공동체를 찾아 희망을 말하는 르포도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흘렀던 몸의 증언이자 밀려난 몸의 연대기, 이어 쓰는 연대다.
혼자서만 신이 된 구름 같은 자유는 허상일 뿐이다. 나는 하늘 위의 구름이 아니라, 사회에 발 딛고 뒹구는 정치적 존재다. 언제나 흐름 속에 놓인 정치적인 몸이다. 그러므로 나의 해방은 나만의 몫이 아니다. 사회적 치유 없이는 나의 회복도 없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정홍칼리
억울한 넋을 기록하는 무당. 구천을 떠돌다 북한산 끄트머리 마을에 머물고 있다. ‘미신’이라 불린 감각으로 저항한다. 문장에 넋 싣기, 피부에 부적 새기기, 콩 불리기, 만트라로 주술 걸기, 집회에서 넋 풀기 등 각종 비방으로 정상성의 망령을 태운다.책 《붉은 선》, 《신령님이 보고 계셔》, 《무당을 만나러 갑니다》 등을 기록했고, 만트라 앨범 《해방당굿》, 《지구넋모심굿》, 《마녀들의 허밍》을 지었다.굿당의 위치는 이 책의 문장 사이, 당신의 침묵 아래다.
목차
들어가는 말
그 여정은 해방이었을까 추방이었을까·4
1부 자리 찾기
지붕 없는 집·15
추방과 해방과 포섭·21
머뭇거릴 용기·31
떠돌이의 짐·36
자리 찾기·43
2부 틈새 표류기
나는 한국에서 사라지고 싶었다·53
도망가자, 멀리멀리·58
저항하는 틈새들·66
그래도 표류할래·76
아무 말 없는 사랑·85
콩글리시 해방전선 알유해피·98
3부 정체성 횡단기
내 이름은 내가 정해·113
글 쓰는 디지털 떠돌이·122
글로벌 성노동자·128
지구 무당·142
맨발 동물·156
구멍 난 몸: 틈새꽃잎·166
미친년 순례기·179
4부 이방인 연대기
빈털터리 이방인·191
탁발 수행자·202
이방이가 된 토박이·210
물건들의 안식처·225
콩 불리기·229
소멸하기·239
돌아온 자리·245
나가는 말
쓰는 자리에서·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