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윤명희 시인은 언어의 관습적 구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시적 발화의 새로운 지평을 탐색한다. 기성시단의 익숙한 의미 체계의 전복을 통해 독자에게 감각적 충격과 사유의 공감을 유도한다. 그의 시어는 일상의 파편적 이미지와 내면의 심층 감수성을 교차시키며, 언어와 사물 사이의 불확실한 간극을 시화하고 있다. 이러한 미학적 실험은 단순한 형식적 파격을 넘어 시가 현실을 인식하고 전유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는 오늘의 시문학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언어 실천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로, 동시대 시의 형식과 내용을 제시하는 중요한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출판사 리뷰
작품 해설
익숙한 의미 체계의 전복(顚覆)을 통한
새로운 미학적 시도(詩道)
민용태(고려대 명예교수, 스페인 왕립한림원 위원)
윤명희 시인은 언어의 관습적 구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시적 발화의 새로운 지평을 탐색한다. 기성시단의 익숙한 의미 체계의 전복을 통해 독자에게 감각적 충격과 사유의 공감을 유도한다. 그의 시어는 일상의 파편적 이미지와 내면의 심층 감수성을 교차시키며, 언어와 사물 사이의 불확실한 간극을 시화하고 있다. 이러한 미학적 실험은 단순한 형식적 파격을 넘어 시가 현실을 인식하고 전유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그는 오늘의 시문학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자기반성적인 언어 실천을 보여주는 드문 사례로, 동시대 시의 형식과 내용을 제시하는 중요한 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그런 만큼 윤명희 시인의 시는 기존의 기성시에 묻혀가지 않는 순수성이 발견된다. 윤명희 시인만의 시세계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아침
누군가에게 잊혀진다는 게
얼마나 쓸쓸한 일이기에
하늘마저 어깨를 떨구는가
얼마나 많은 낮과 밤을 같이 지낸
나무는 때가 되면 저렇게 알아서
제 살 같은 잎사귀를 땅으로 보내고
묻고 사는데
그렇게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너는
밤새 하늘의 넋두리를 들어줬으리라
그럼에도
오늘 아침 하늘의 어깨는 이만치 내려앉아
나의 어깨 위로 쏟아지고 고스란히
하늘의 무게를 지고 간다
누군가에게 잊혀진다는 게
얼마나 쓸쓸한 일이기에
- 「잊혀진다는 게」 전문
사랑의 끝은 슬픔이 아니라 잊혀짐이다. 이것을 윤명희 시인은 빈 어깨의 무거움이라고 말한다. 그보다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잊혀지는 것은 “하늘의 어깨를 지고 가는” 일이란다. 나무들이 잎사귀를 다 떨구고, 아니면 “제 살 같은 잎사귀를 땅으로 보내고/묻고 사는데/그렇게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는 너는/밤새 하늘의 넋두리를 들어줬으리라”는 시인의 성찰에는 아픔을 넘어 깨달음의 경지가 보인다. 대단히 훌륭한 이미지이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이 다 끝나는구나 하는 느낌이 잊혀지는 일은 마지막에 오는 쓸쓸함이다.
아르헨띠나 유명한 시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시 “무명시인(Poeta menor)”이라는 시에는 득도에 가까운 위안을 주는 망각의 아픔을 노래한다:
결국은 다 잊혀지는 것
나는 좀 일찍 도착했다
La meta es el olvido
Yo he llegado un poco antes
윤명희 시인의 상처와 아픔은 뼈에 사무친다. 어느 눈 내리는 날 아침의 단상을 보자:
앙상한 내 몸에 살이 되어버렸는가
너로 인해 받은 상처와
너 때문에 쌓여진 슬픔과
그럼에도 피어오르던 그리움까지 더해서
순백같이 되어버린 눈꽃
보란 듯이
그럼에도 이렇게 빛나노라
그럼에도 이렇게 정결하노라
그럼에도 이렇게 당당하노라
말하고 있는
눈꽃
그저 보이지 않았을 뿐
넌 고스란히 그렇게 내 몸의 살로 남았다고
그럼에도 아무 때나 보이지 않고
이렇게 온 세상 꽁꽁 얼어붙을 때
보란 듯이
순백으로 온몸을 드러내는 너
너는 눈꽃
- 「보란 듯이」 전문
상처도 아픔도 다 잊고 “보란 듯이/순백으로 온몸을 드러내는 너/너는 눈꽃”이란다. 윤 시인에게 눈과 눈꽃은 사랑의 깊은 상처를 숨기고 잊고 일부러 “보란 듯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렇게 온 세상 꽁꽁 얼어붙을 때” 의연하게 내리는 미소 같은 거란다. “보란 듯이/그럼에도 이렇게 빛나노라/그럼에도 이렇게 정결하노라/그럼에도 이렇게 당당하노라/말하고 있는/눈꽃”은 시인과 동일시된다.
윤명희 시인이 이토록 의연하고 참한 것은 어쩌면 순박한 “시골내기”여서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내 마음이 시골”, 즉 시가 사는 마을이라고 말한다. 고향을 그리는 그녀의 “자암마을 끝집에서”라는 시를 보자:
내 마음이 시골
마음이 사는 집은 시골집
지키는 이 없어도 장독대에 장은 익어가고
주인의 손때가 닿던 곳마다 번질거리고
대나무숲에 사는 바람이
느닷없는 발자국에 조잘거리느라 바쁘고
채마밭에 자라고 있는 배추 속에서 배부른 친구가
배춧잎 구멍으로 낯선 이를 엿보는
내 마음이 사는 시골집
누구의 마음이었는지 흩날린 곳마다
꽃무릇이 제각기 고개를 내밀고 인사하고
앙상하나 가녀리지 않고
투박하나 정갈한
높은 지조 아래 살던 고운 이의 낮은 지붕
더벅머리 같은 주목 옆에
새초롬한 향나무도 의좋게 지내는
엄마의 마음이 울타리처럼 둘러져
모든 것을 키우고 있는 시골집
내 마음이 사는 집이 시골집
- 「자암마을 끝집에서」 전문
“지키는 이 없어도 장독대에 장은 익어가”는 곳이 시가 사는 곳이다. “투박하나 정갈한/높은 지조 아래 살던 고운 이의 낮은 지붕”에서 시인이 자란다.
“더벅머리 같은 주목 옆에/새초롬한 향나무도 의좋게 지내는/엄마의 마음이 울타리처럼 둘러져/모든 것을 키우고 있는” 집이 시가 크는 곳이다. 높은 지조와 향을 지키고 사는 일이 시를 짓는 마음이다.
그래서 시를 쓰는 윤명희의 자세는 좌선에 가깝다. “토요일 오후 3시”는 모든 사람의 휴식 시간이면서 시인이 명상에 빠지는 시간이다:
설레는 시간
무엇을 해도 괜찮을
무엇을 해도 행복할
무엇을 해도 용서될 것 같은
마법 같은 시간
저수지 위에 햇살도 누워 잠시 쉬는
물오리도 언저리로 가서
햇살의 단잠을 깨우지 않는
고요와 배려와 사랑만 가득한 시간
시간으로 태어나서 이런 행운이 어디 있을까
엄마 젖을 배불리 먹고 곤히 잠든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든 햇살 옆에 가서 살포시 누워본다
- 「토요일 오후 3시」 전문
이 시는 수도자의 명상처럼 편안하고 넉넉해서 좋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속세의 시간이 열반이다. 우리는 때때로 어느 “토요일 오후 3시” 같은 일상 속에 이런 “마법의 시간”을 발견한다. 구태여 찾아서 찾은 게 아니다. “무엇을 해도 괜찮을/무엇을 해도 행복할/무엇을 해도 용서될 것 같은” 아무렇지도 않은 그저 그런 시간이다. 그럴 때 이런 시간이 온다. “저수지 위에 햇살도 누워 잠시 쉬는” 한 순간. 이것은 낚시꾼의 한가하지만 의도가 있는 기다림이 아니다. “물오리도 언저리로 가서/햇살의 단잠을 깨우지 않는” 자연의 자연스러운 스스로의 “배려”가 돋보이는 시간이다. “고요와 배려와 사랑만 가득한 시간/시간으로 태어나서 이런 행운이 어디 있을까”. 특히 마지막 구절 “시간으로 태어나”라는 추상 이미지의 “태어남” 같은 의인화, 구상화가 뛰어나다. 이런 표현은 이미지 수사법이 많이 숙련된 시인임을 보여준다. 이런 이미지즘은 자연 중에 가장 순수한 “엄마 젖을 배불리 먹고 곤히 잠든 아기”의 모습이다. 그것이 다시 “새근새근 잠든 햇살”이란다. 그것을 흉내 내서 “옆에 가서 살포시 누워본다” 자연의 명상을 본 딴 가장 차원 높은 명상!
그래서 윤명희 시인의 시는 학교나 강의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자연 사랑에서 배운 것이다. 그녀의 시도(詩道)를 보자:
마음길 따라가기 어려워
내 발 내 손은 묶어두고
詩만 딸려 보냈더니
아니나 달라
눈물만 방울방울 달고 와서는
그러하니
내 詩는
눈물자국 위에 쓰여지더구만
얼마나 험하고 멀었으면
마음길 위에 뭐가 있었으려나
내 맘 나도 알 수 없으니
이정표도 경고표시도 없다네
- 「길 위에서」 전문
대도무문(大道無門)이다. 무슨 문이나 이정표가 따로 있으랴. “내 발 내 손은 묶어두고/詩만 딸려 보냈더”란다. 눈물방울, 눈물자국, 고생이 시도수련(詩道修練) 아니겠는가? 마음 닦기는 길이 멀어도 포기할 수 없다. 인생이 고생길이라고 삶을 그만두랴?
살다 정말 힘들 때는 “제주 바다”를 보러간다:
멀리 던지려 했어
내 안에 있는 무거운 것들
밤바다에 던지면 될 거 같았어
그런데 차마 그러지 못했어
내 것보다 더 무겁고 더 차갑고 더 외롭게
일렁이고 있는 바다를 그저 위로했지
낮에 찾아갔어
다시 던질까 고민했어
모래까지 비치는 옥색 바닷속에
도저히 나의 시커먼 것을 버릴 수가 없드라
초록빛 일렁이는 바다가 날 위로하대
넘 부끄러워 돌아섰어
제주도 바다에서
- 「제주 바다」 전문
아픈 사랑, 아픈 인연 버리려 제주 바다에 갔다. 제주 밤바다에 모든 것 다 버리려고… 그런데 “내 것보다 더 무겁고 더 차갑고 더 외롭게/일렁이고 있는 바다를” 발견한다. 바다에 비하면 내 고독과 아픔은 넘 작았지. 그래서 “넘 부끄러워 돌아섰어”라고 고백한다. 그 고난 속에서도 “초록빛 일렁이는 바다”에 나의 그 무겁고 시커먼 번뇌를 버릴 수는 없었단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인의 마음인가? 시인은 생각한다:
사람 사는 일이
하늘은 이미 알아서
그저 구름 몰고 다니며 사는 걸까
사람 사는 일이
나무는 벌써 알아서
그저 산에 터를 잡고 사는 걸까
사람 사는 일이
강물은 이미 알아서
그저 모든 것 두고 흘러만 가는 걸까
사람 사는 일을
사람만 모르고
사는 걸까
- 「사람 사는 일이」 전문
시인은 하늘에게서, 나무에게서, 강물에게서 사람만 모르고 있는 것을 배운다. 세상사는 다 구름이라고 하늘에게서 배운다. 더러는 다 잊고 산에 가서 터를 잡고 사는 것이 좋다고 나무에게서 배운다. 그보다 강물에게서 그전 모든 것 다 두고 흘러가자고 하는 충고를 듣는다. 시인은 이렇게 자연을 관찰하고 느끼고 배우고 또 가을에게서 본을 받는다:
자기가 시들어야 할 때임을 알고
스스로 시들 줄 아는
자기가 더 이상 붉어져서는 안 되는 때임을 알고
스스로 퇴색해질 줄 아는
자기가 더 붙어있지 않아야 하는 때임을 알고
스스로 떨어질 줄 아는
가을은
어설픈 성장보다
현명한 성숙을 아는 것들로
가득한 계절이다
- 「가을은 1」 전문
가을에게서 현명하게 익어가는 법을, 현명하게 성숙해가는 지혜를 배운다. “어설픈 성장”이나 우쭐대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내려놓고 떨어지는 미덕도 배운다. 욕심을 버리고 “믹스커피” 한 잔은 또 어떤가?
이거면 족하다
믹스커피 한 잔의 달달함
이거면 족하다
내 발아래 나뒹구는 낙엽
두서너 개면 족하다
낙엽이 이불 되어 푹신하게
날 덮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밟아야 하는 내 마음 한켠
덮어줄 낙엽 두서너 개
이거면 족하다
까맣고 영롱한 블랙커피 아니어도
개운한 끝맛 아니어도
묵직한 믹스커피 한 잔의 달달함
이거면 족하다
- 「믹스커피를 마시며…」 전문
그저 스스럼없이 여기저기 섞여서, “믹스커피 한 잔의 달달함/이거면 족하다”. 아니면 “내 발아래 나뒹구는 낙엽/두서너 개면 족하다”. 이걸로 덮고 추위와 외로움을 덜면 되니까. 풍경은 시인이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말해준다:
피어오르는 것들은 다 사연이 있다
말할 수 없는 갖가지 사연들
강물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피어올려야만 하는 것
넘실대는 것은 넘치기 마련이니
내 안에 차오르는 것을 퍼낼 수 없어
피어올려야만 하는 것
다만, 피어오르는 것들은
이내 자취를 감춘다는 것
무엇으로 인해 피어올랐는지도 모르게
망각하게 하는 것
- 「살아갈 수 있는 이유」 부분
윤명희 시인은 사랑하는 “너”를 위해서 시인이 되고 싶었단다: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촉촉이 젖은 가을비 오는 아침
흰 캔버스에 파스텔 톤 유성물감으로
이 아침을 그려 너에게 주고 싶어
내가 노래를 지을 수 있다면
대지에 젖은 비를 오선 줄 삼아
음표로 그려 가을의 농염함을
이 아침 너에게 불러주고 싶어
난
너를 위한 시인이고 싶었어
이 좋은 아침을 너에게
선물할 수 있다면
- 「더없이 좋은 아침」 전문
우리가 사는 자연에 곱고 예쁜 게 많아서, 꼭 너에게 전해주고 싶은 게 많아서 나는 화가가 되고 시인이 된다. 너무 기분이 좋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듯이, 아니면 미당 서정주 님처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이” 더 그리워서 시인이 되고 싶은 것. 이 얼마나 참한 마음인가?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하고 성나게 하기도 한다. 그러면 “작달비”가 온다:
성난 당신의 마음이
장대비가 되어
내 가슴에 내리는 날
어떻게 다독여야 하나
동동거리고 있을 동안
그의 눈물이 내 가슴을 파고
내를 이루어 흐르는구나!
둑조차 없는 내 가슴이
허물어져 허허벌판처럼
쓸고 지나간 눈물자국마다
하얀 안개꽃이 핀다.
- 「작달비」 전문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와 감흥의 심상(心象)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이미지란 바로 이런 경우에 가장 적절하게 구현된다. 예를 들어 “그의 눈물이 내 가슴을 파고/내를 이루어 흐르는구나!” 같은 시표현은 감동의 파문을 대단히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그 바람에 “둑조차 없는 내 가슴이/허물어져 허허벌판”이 되고, 거기 떨어진 “눈물자국마다/하얀 안개꽃이 핀다”는 교감의 이미지는 일품이다.
이런 묘한 사랑의 교감은 “묘한 밤”에서 절정에 이른다:
달도 웃고
나도 웃고
하늘은 한옥마당에 내려와 앉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은하수가 되어
어둠을 가르고
오작교가 되어
25년이란 시간을 만나고
너는 알고
나는 몰랐던
이야기들로
별들도 화들짝 놀랐던 밤
감출 것도 없이
부끄러운 이야기가
세상의 별이 되어
뽀얗게 다시 태어나는 밤
오늘은 묘한 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세 번째 이야기가 기다려진다.
- 「묘한 밤」 전문
사랑의 이야기가 더욱 구체적이었으면 더 좋았을 밤하늘 이미지들이다. 하늘이 한옥마당에 내려와 앉은 장면이라든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은하수가 되어/어둠을 가르고/오작교가 되어/25년이란 시간을 만나”는 이미지는 참 아름답다. 무엇이 그리 놀라웠는지 “별들도 화들짝 놀랐던 밤”이란다. 이런 이야기는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보다 실감 나는 스토리와 이미지의 연결이 효과적이기도 하다.
나이 들다 보면 더러 쓸쓸해지는 것이 인생이다. 그때 시인은 말한다:
묻고 싶은데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어스름 저녁 시간에 이유 없이 밀려오는
쓸쓸함은 어디서 오는 건지
혹여 그 대답이 석양이었을까요
쓸쓸함이 무엇인지
누가 알까요
슬픔도 아닌
우울함도 아닌
차분한 마음속에서 유유히 흐르는
내 물음에 강물도 숨을 죽이고
되려 내 대답을 기다리네요
- 「쓸쓸함에 대하여」 전문
첫 연에서 “혹여 그 대답이 석양이었을까요”라고 “석양”의 이미지를 끌어온 것은 대단히 적절하다. 인생이 저물어가는 느낌과 “석양”은 그 서글프고 붉은 마음까지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거기에 다시 강물의 이미지를 가져오는 것은 그 연결이 묵시적이어서 좋다. “슬픔도 아닌/우울함도 아닌/차분한 마음속에서 유유히 흐르는/내 물음에 강물도 숨을 죽이고/되려 내 대답을 기다리네요”라는 시표현은 시간의 흘러감의 느낌을 야단스럽지 않은 동양철학적 체감으로 묘사한 것이 일품이다.
다음 “탄다는 것은”이라는 시는 대단히 다채로운 이미지를 “탄다”는 말로 이끌어 “느낌”으로 조합시키는 시법이 기발하다:
가을을 탄다는 것은 가을을 느끼고 있는 거다
커피를 타면서 커피향을 느끼고
가야금을 타면서 가야금을 느끼고
파도를 타면서 파도를 느끼고
애를 타는 것은 사랑을 느끼고 있는 거다
그러니
탄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내가 살아있음에 탈 수 있는 것
날 애태우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
가을을 타는 당신을 응원하는 이유
- 「탄다는 것은」 전문
1연에서 “파도 타기”와 “애를 타는” 사랑의 마음을 잇는 것이 놀랍고 아름답다. 거기에 그 느낌에 감사함을 느끼는 윤 시인의 사려 깊은 성찰은 깊어서 더욱 뛰어나다. 그리고 마지막에 “날 애태우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을을 타는 당신을 응원하는 이유”로 끝내는 것은 윤 시인의 시 쓰기가 이미 어느 경지에 이르렀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윤명희 시인의 시는 가끔 센티멘탈리즘에 젖은 말랑한 감상조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젊은 한때. 시간이 가고 나이가 들다 보면 다 익고 여물어지는 법. 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 반추해보면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지 하는 감응에 잠기기도 한다.
앞으로 좋은 시들이 많이 나오리라 기대가 크다. 이번 첫 시집이 문학의 마중물이 되어주길 바라며 좋은 시집 출간을 축하한다.
작달비
성난 당신의 마음이
장대비가 되어
내 가슴에 내리는 날
어떻게 다독여야 하나
동동거리고 있을 동안
그의 눈물이 내 가슴을 파고
내를 이루어 흐르는구나!
둑조차 없는 내 가슴이
허물어져 허허벌판처럼
쓸고 지나간 눈물자국마다
하얀 안개꽃이 핀다.
믹스커피를 마시며…
이거면 족하다
믹스커피 한 잔의 달달함
이거면 족하다
내 발아래 나뒹구는 낙엽
두서너 개면 족하다
낙엽이 이불 되어 푹신하게
날 덮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밟아야 하는 내 마음 한켠
덮어줄 낙엽 두서너 개
이거면 족하다
까맣고 영롱한 블랙커피 아니어도
개운한 끝맛 아니어도
묵직한 믹스커피 한 잔의 달달함
이거면 족하다
토요일 오후 3시
설레는 시간
무엇을 해도 괜찮을
무엇을 해도 행복할
무엇을 해도 용서될 것 같은
마법 같은 시간
저수지 위에 햇살도 누워 잠시 쉬는
물오리도 언저리로 가서
햇살의 단잠을 깨우지 않는
고요와 배려와 사랑만 가득한 시간
시간으로 태어나서 이런 행운이 어디 있을까
엄마 젖을 배불리 먹고 곤히 잠든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든 햇살 옆에 가서 살포시 누워본다
작가 소개
지은이 : 윤명희
1973년 전북 진안군 출생전북대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졸업문학바탕 2023년 11월호(시인 등단)『시와 에세이 19』 동인지 참여한국문인협회 회원(유)대한관광여행사 대표이사전주성인교회 권사 시무
목차
저자 소개 2
시인의 말 3
1부
라일락 꽃을 곁에 두고 12
나무와 당신 14
소나무와 구절초 16
古木의 禮 18
청단풍 아래 앉아서 21
대나무 숲길에서 22
복수초 앞에서 24
작달비 25
널 생각하면 26
더없이 좋은 아침 27
외사랑 28
채송화 29
너의 해라고 적어 놓을게 30
시작하지 않은 사랑에 이별을 고하며 32
마중 34
낭만 36
비밀 37
널 보내며 38
정상에서 39
아침 통화 41
2부
꽃무릇 44
이분법 46
시 한 줄의 나 47
그땐 몰랐지 48
반송 세 그루 50
슬픔아 52
사람 사는 일이 55
이른 아침 동틀 때 56
벚나무 아래에서 57
가을은 1 59
약속 60
살아갈 수 있는 이유 63
묘한 밤 64
쓸쓸함에 대하여 66
믹스커피를 마시며… 69
탄다는 것은 70
나는 1 71
단풍을 보며 72
좋은 사람의 기준 75
11월 어느 날 내리는 비 76
3부
내 방에서 81
무뎌져선 안 되는 것들 82
12월의 문턱에서 83
제주 바다 85
그러더구만 86
어느 날 88
때로는 이렇게 살아봄도 어떠리 90
길 위에서 92
얼굴 한번 보자고 95
토요일 오후 3시 96
흔적 98
복숭아나무 100
자암마을 끝집에서 102
가을앓이 105
보란 듯이 106
말로 무엇을 더 하랴 108
고민 109
귀한 인연 110
꽃무릇 있던 자리에 112
꽃밭에서 113
꽃한테 배웠지 114
4부
내가 나에게 보내는 시 118
눈 오는 창가에서 120
내 맘이 쓰레기 같았을 때 122
도시락 123
다짐 1 124
끝에 있는 것들은 다 희망입니다 127
너는 내게 꽃이었음을 128
마음꽃 1 130
마음이 나한테 하는 말 131
반주로 막걸리 한잔 132
복수초를 보고 와서 134
비 오는 새벽에 137
봄비 내리는 밤에 138
비 오는 스산한 날의 단상 140
슬며시라는 말이 좋아서 142
시간과 동행하며 145
잊혀진다는 게 146
칼의 노래 148
행복한가 150
작품해설
익숙한 의미 체계의 전복(顚覆)을 통한
새로운 미학적 시도(詩道)_민용태 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