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소개
반시시인선 15권. 백지은 시집. 한 사람의 내면을 통과해 나온 언어란 부득이하게 자기 의식적이다. 무엇보다 시는 삶의 섬유질 사이사이를 통과해 나온 언어답게 쓴 사람의 내밀한 기억을 결로써 간직한다. 어떤 기억, 혹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이 글의 목적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백지은 시의 ‘기억’을 해석하는 데 있다.
출판사 리뷰
시는 왜소한 인간의 내면에 그려진 세계의 흔들림, 그 흔들림의 언어적 표현이다. 때문에 한 사람의 내면
을 통과해 나온 언어란 부득이하게 자기 의식적이다. 무엇보다 시는 삶의 섬유질 사이사이를 통과해 나온
언어답게 쓴 사람의 내밀한 기억을 결로써 간직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물질과 달리 인격적 존재는 과거
― 현재― 미래를 잇는 기억의 순수 지속으로 말미암아 자기 동일성이 가능해진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인
간의 기억은 체계적이고 연속적이기보다는 불연속적이고 파편적이다. 기억은 주체의 내면에 “조각처럼 부서지며 스쳐가”지만, 반대로 끝끝내 망각을 거부하며 집요하도록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기억도 있다. 레코드판 위에 놓인 바늘이 한 곡만을 무한 재생하는 고장 난 턴테이블처럼, 어떤 기억, 혹은 어떤 특정한 대상에 대한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일차적으로 이 글의 목적은 ‘아버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백지은 시의 ‘기억’을 해석하는 데 있다.
라훌라
빨랫줄에 걸린
옥양목 치마 펄럭거리네
2월의 바다도 출렁거리네
떠난 아버지
출렁거리고 있네 펄럭거리네
부재의 시간이 378일 되었네
물 위로 나비가 되어 날아가시네
노란색과 파란색이 춤을 추고 있어
내리막 저만치 가고 없는 아버지
해진 바랑에는 팔공산 절 냄새 스며있네
바랑지고 바다로 가시나
반월당 저만치 떠난 아버지
내리막을 데리고 내려가시네
떠난 아버지 수렁 속을 헤매시네
벽
설거지통에 그릇을 쏟아 부었다
그릇이 이가 나가 손가락을 다쳤다
어디가 아픈게지
도마 위 칼이 빤히 보고 있다
온종일 떠돌다 돌아온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안과 밖이 서로를 가둔다
벽은 견고하고
문을 열어야 문을 닫을 수 있다
이가 나간 그릇을 바람 속에 던져 버렸다
다친 손가락은 어디로 갔을까
아버지는 떠났는데 벽에 걸린
아버지의 사진이 벽을 만든다
아버진 현관문의 비밀 번호였다
아버지를 누르면 벽이 열릴까
갈대밭 철새
그녀의 뇌 속은 동굴이다
머리카락 끝엔 고드름처럼
그녀의 남편이 매달려 있다
바다가 사납게 울고 하늘에서 내린 빗물이
세상 모든 눈물보다 더 깊이 땅을 파고들 때
폐선을 타고 해운대 파도 속을 헤집었다
푸른 사과 한 조각을 입속으로 넣어 주는 딸을
남편이라 생각한다
어디 갔다 지금에야 왔어요?
금니가 형광등 불빛에 반짝이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막이 내려진 무대조명 같다
당신 잘못 한 거 없어요, 울지 마요
별안간 파티마병원 503호
숲으로 변한다
그녀는 웃는 새
딸은 우는 새
병상엔 온갖 음으로 노래하는 새
둘이서 걷던 갈대밭에는 바람 소리만
그때 철새 한 마리
날아들어 산소호흡기 위에 앉는다
삐~~
그녀의 뇌 속 동굴이 환해진다
503호 숲 무대 저편이 되었건만
둘이서 걷던 갈대밭에 바람 소리만 들린다
작가 소개
지은이 : 백지은
경북일보 문학대전 대상 수상『시에』 등단동서문학상 수상
목차
| 제1부 |
라훌라
벽
갈대밭 철새
아버지의 보청기
아버지와 햄버거
중고서점
아버지의 바다
납작한 죽음
창가에 앉아
달빛에 담아
적멸寂滅
안부
스타벅스
| 제2부 |
절규
낯익은 풍경
오징어
길
읍성엔 비가 내려서34 똑딱 단추
멀어진 봄날
미도다방
택배
24인치의 세상
고래 사냥
귀 얇은 목련 나무
서문시장 수제빗집
| 제3부 |
오래 버려둔 시간
시애틀로 떠난 엄마
엄마는 일터에 가고 아이는 나비가 되어
애견백화점
장미와 생선가시
서랍속에 갇힌 시절
L교수
거미에 대하여
밍기뉴 나무
제제, 가족이 되다
우엉
P에게로
| 제4부 |
미안합니다
꽃밭에서
K 화백의 자화상
속눈썹을 줍다
빨간 사서함
오월의 담장
414번 버스 풍경
늦지 않게 너에게 닿기를
다림질
서울역에서
매미가 운다
십 센티 두께의 세상
一 子 영토
삽화처럼
캐슬 고양이
여고시절
해설 기억의 두 가지 방식|신상